우리가 잊고 있던 스릴러의 힘, <페이퍼 타이거>
스칼렛 요한슨, 아담 드라이버, 마일스 텔러가 출연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사소한 실수와 지나친 자신감이 한 가족의 삶을 뒤흔드는 과정을 그린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상영작.
우리가 잊고 있던 스릴러의 힘, <페이퍼 타이거>
스칼렛 요한슨, 아담 드라이버, 마일스 텔러가 출연하는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사소한 실수와 지나친 자신감이 한 가족의 삶을 뒤흔드는 과정을 그린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상영작.

조예은 에디터

어떤 스릴러는 보는 동안에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긴장감도 넘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극장을 나선 뒤에도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스릴러가 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듯한 불안감을 안기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상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그 두려움은 누군가를 향한 것일 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제임스 그레이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페이퍼 타이거>가 바로 그런 스릴러다. 이 작품은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다. 다만 이 영화를 스릴러라는 장르로만 규정하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 영화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더는 행복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서로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챙기는 형제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형제 사이에는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끈끈하게 묶어주는 묘한 관계가 있다. 서로를 향한 반감이 오히려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부모가 된다는 것의 외로움도 들여다본다. 아이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도 괴롭지만, 어쩌면 더 견디기 힘들 때는 아이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세상과 단절된 채 홀로 섬에 남겨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다. 두려움에 짓눌리면서도 그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때 말이다.
몇몇 장면에서는 숨이 막힐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레이 자신도 이런 재능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가 이제야 발견한 듯하다. 바이올린의 줄감개를 조심스럽게 조이듯, 관객의 신경을 조금씩 팽팽하게 당겨가는 솜씨가 놀랍다. 좋은 의미에서 <페이퍼 타이거>는 고전적인 영화다. 요즘 많은 미국 감독이 만드는 법을 잊었거나, 애초에 배운 적조차 없는 종류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1986년 뉴욕 퀸스의 노동절 연휴에 시작된다. 미국에서 한 해 중 가장 쓸쓸하면서도 들뜬 이때, 아이들은 개학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부모들은 오히려 반긴다. 스칼렛 요한슨과 마일스 텔러가 연기하는 헤스터와 어윈 펄 부부는 열일곱 살 스콧과 십 대 초반의 벤(개빈 구디와 노먼 엥겔)이 새 학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윈에게 좀처럼 연락하지 않던 형의 전화가 걸려 온다.
은퇴한 경찰관 게리(아담 드라이버)는 경찰을 그만둔 뒤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당장 돈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그는 컨설팅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며 엔지니어인 동생 어윈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오랫동안 오물과 하수로 몸살을 앓아온 브루클린의 고와너스 운하가 재개발을 앞두고 있고, 이 기회를 노리며 러시아 사업가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이들이 미국의 각종 규정이나 사업 관행을 전혀 모르기에 조언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를 얼마나 귀담아듣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게리의 말만 들으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어윈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두 형제의 성격은 처음부터 뚜렷하게 대비된다. 게리는 사업 이야기를 하겠다며 어윈의 집에 저녁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다. 그래도 식사만큼은 직접 챙겨 온다. 유명한 피터 루거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온 가족이 먹을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 직원들이 직접 집까지 배달해 한껏 근사하게 차려놓는다. 그는 거침없고 매력적이며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다. 스콧과 벤저민은 그런 삼촌을 무척 좋아한다. 식탁에서 카드 마술을 선보일 정도의 손재주는 사업에서도 한몫하는 듯하다. 조카들이 조르자, 바짓단 안쪽에 허벅지용 권총집으로 고정해 둔 총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어윈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집안일을 하나씩 처리하는 평범한 아버지다. 가족을 부양하려는 책임감은 강하지만, 세상 물정에는 조금 어둡다. 게리와 함께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사업가들을 처음 만났을 때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수상한 마피아 조직원이 대화를 주도하는 데다, 촌스러운 박제 청새치가 벽에 걸린 이동식 사무실에서 만나는 자리였는데도 말이다. 어윈은 운하를 살펴보겠다며 밖으로 나선다. 그의 눈에 비친 운하는 거의 마법 같은 풍경이다. 수면을 뒤덮은 오염물마저 반짝이며 빛난다. 촬영감독인 호아킨 바카 아사이가 필름으로 담은 화면에는 오래된 장소 특유의 빛바랜 질감이 배어 있어,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흔적까지 느껴진다.
펄 가족이 사는 퀸스의 소박한 집은 부족함 없이 아늑하다. 하지만 어윈은 가족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새 사업을 하루빨리 시작하고 싶어 한다. 어느 평범한 저녁, 헤스터의 만류에도 그는 두 아들을 차에 태우고 고와너스 운하로 향한다. 새 사업이 펼쳐질 현장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서다.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 일은 아이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만다. 그제야 어윈은 새로 손잡은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이들인지 깨닫는다.
비슷한 시기, 헤스터에게도 불안한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던 중 차가 도로를 벗어나 나무를 들이받은 것이다. 그 이후로 시야에 문제가 생긴 듯하지만, 그는 어윈과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 한편, 게리는 여전히 거침없다. 어떤 문제든 피해 갈 수 있고, 오해가 생겨도 말솜씨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는 중이다. 그런 남성 특유의 거리낌 없는 여유는 동생이 부러워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어윈의 잘못된 판단, 게리의 지나친 자신감, 가족을 돌보는 소중한 순간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헤스터의 두려움. 이 가족의 비극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사소한 실수와 성격적 약점에서 시작된다. 평소에는 별문제 없이 넘어갈 일들이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페이퍼 타이거>는 바로 그런 일상에 대한 영화다. 잠깐의 방심이나 단순한 불운만으로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다정함이 깃든 스릴러기도 하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인물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만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텔러는 어윈의 순진함을 동정받아 마땅한 모습이라기보다,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성향으로 그린다. 어윈 자신에게는 그 순진함이 부끄러움의 원인이자, 거의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이 된다. 요한슨의 연기는 특히 훌륭하다. 가족에게 닥칠 수도 있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미래를 잠시 떠올리는 짧은 장면이 강렬하다. 그 순간에 많은 것을 담아내며 영화 전체를 조용히 지탱한다.
드라이버가 연기하는 게리는 모든 것을 유난스러울 만큼 과장된 몸짓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긴 팔다리마저 마음껏 휘두르며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간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실제로 그런 믿음대로 살아온, 운 좋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얼굴에는 끓어오르는 절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절망은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다.
<페이퍼 타이거>는 여러 면에서 그레이의 전작들과 맥을 같이한다. 가족의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퀸스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만든 반자전적 영화 <아마겟돈 타임>과도 맞닿아 있다. 러시아계 갱단의 위협에 놓인 브라이턴 비치의 한 가족을 다룬 인상적인 데뷔작 <비열한 거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하나의 새로운 도전처럼 다가온다. 복잡한 세계의 미묘한 결을 다루는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섰기 때문이다. 특히 브라이언 드 팔마가 더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지금, 이런 요소들을 능숙하게 엮어낼 수 있는 감독은 드물다.
조용하지만 오페라처럼 강렬한 영화다. 음악도 그렇다. 잃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들을 잃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지 되새기게 하는 선율이 영화 전체에 흐른다. 관객은 소중한 것들을 누리고 있다는 감사와 언젠가 그것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함께 안은 채 극장을 나선다. 음악을 맡은 크리스토퍼 스펠먼은 고등학교 시절 그레이의 라틴어 교사였다. 이 영화의 스코어는 올해 나온 영화 음악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
영화, 특히 미국의 주류 영화는 지금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불과 20년 전, 혹은 10년 전만 해도 극장을 채웠을 법한 영화들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미국 영화는 <페이퍼 타이거>를 포함해 단 두 편뿐이다. 다른 한 편은 아이라 잭스 감독의 <내가 사랑하는 남자>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이처럼 세계적인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만한 영화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를 낮출 수밖에 없는 시대다. 하지만 <페이퍼 타이거>는 ‘어른’을 위한 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갖췄다.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넓어지기는커녕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 비로소 만들 수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크게 한판 벌이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거나. <페이퍼 타이거>에서 그레이는 두 가지를 모두 해낸다.
글 Stephanie Zacharek
한국어판 편집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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