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질서에 일으킨 작은 소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아시아의 장면들]
요양원 원장 마리루와 연극 연출가 마리의 만남은 돌봄과 죽음, 노동과 자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되묻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예술 등의 작은 실천을 통해, 지금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연대의 가능성을 그린다.
세상의 질서에 일으킨 작은 소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아시아의 장면들]
요양원 원장 마리루와 연극 연출가 마리의 만남은 돌봄과 죽음, 노동과 자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되묻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예술 등의 작은 실천을 통해, 지금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연대의 가능성을 그린다.

조예은 에디터
![세상의 질서에 일으킨 작은 소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314%2F45e9d15513a448d5811442d60b2f9487.jpg&w=3840&q=75)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제79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의 비르지니 에피라와 오카모토 타오가 수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가 경쟁 부문에 초청된 이후 4년 만이었다.
이미 <해피 아워>(2015)로 로카르노영화제 여우주연상, <우연과 상상>(2021)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칸영화제 각본상과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이번 신작은 그의 첫 해외 공동제작이자, 프랑스인 제작진과 배우가 함께 참여했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된 지 다섯째 되던 날, 셀 수 없는 티켓팅 시도 끝에 소문의 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관객으로 꽉 찬 극장에서 따뜻한 색의 화면 속 등장하는 사람들. 이는 돌봄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만난 두 사람

요양원 ‘자유의 정원’ 원장 마리루가 실천하려는 ‘휴머니튜드(Humanitude)’는 하나의 철학이다. 몸을 낮춰서 상대와 눈을 맞추고, 자기소개와 함께 지금 해드릴 일을 천천히 일러주는 것. 돌봄을 진행하는 동안 계속해서 부드럽게 접촉하며, 직립을 할 수 있게 곁에서 도와주는 것. 몸이 불편하거나 인지장애가 있는 어르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행하는 노력으로, 당장의 수익 창출이나 효율적인 돌봄 서비스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열악한 환경 속에 방치했었다는 죄책감에서 시작한 그의 결심과 행동은 현재 운영 중인 요양원의 공식적인 방침이 된다. 물론, 이를 정착시키기까지의 촉박한 시간과 부족한 인원, 현저히 적은 재원은 마리루를 이도 저도 못 하게 만든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원망 어린 시선과 걱정 어린 마음들, 끊임없이 자신을 소진하며 유지하는 빡빡한 일정은 이내 그를 번아웃에 빠트렸다. 그런 그의 앞에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마리루가 자폐 스펙트럼증이 있는 토모키를 잠깐 돌봐주었기에 마리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공연 중인 자신의 연출작, <가까이 다가가 보면, 누구도 정상은 아니다.(Da vicino nessuno è normale)>에 초대한다. 정신병원을 폐쇄했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프랑코 바자리아(Franco Basaglia)의 이야기를 다루며,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기준 자체를 되묻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기나긴 대화와 산책이 이어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는 고령화와 저출산을 야기한다’라는 주장을 전제로 밤새 얘기를 나눌 때는, 애써 가려온 불편한 지점들이 드러난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과 환경으로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지만, 점점 더 높아지는 생산성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나머지, 개인들이 새로운 생명을 양육할 시간이나 보살펴야 할 대상을 돌볼 여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화이트보드 위에 마리가 그린 해당 구조 안팎의 상황들은 성과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자연과 인간을 보여준다. 이는 마리루가 요양원에서 실현하려는 바람이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동시에 노화와 장애, 질병과 계급,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갈등들. 효율적인 풍경을 위해 지우려 했던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장의 오늘과 이곳을 위해, 내일과 저곳을 소진하는 방식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결국 남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안정적이고 깔끔한 삶 대신, 통제할 수 없는 변수와 보이지 않는 손에 좌우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리는 ‘틈’을 찾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이러한 흐름에 작은 소란을 일으키는 노력들. 이를 위해 그는 ‘예술’을 계속하고, 마리루는 ‘운동’을 이어 나간다. 그리고 영화는 두 사람의 이러한 연대를 포착한다.
대화와 예술이 허무는 경계

본 작품의 원작은 일본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죽음을 앞두고 나눈 편지를 묶은 서간집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다. 감독은 몇 편의 논픽션 글을 3시간짜리 픽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로 각색했다.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 간의 유연한 경계 넘기를 시도하면서 말이다.
우선, 주인공들의 긴밀한 만남은 쇠약해진 ‘몸’ 덕분에 이뤄졌다. 요양원에서의 고군분투로 수면제에 의지해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의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담대히 지내야 하는 말기 암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리루와 마리는 자신들의 가장 깊은 속내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비록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약해진 심신만큼이나 당신에게 스며들 여지가 더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만큼 자기의 의지와 생각들을 간절히 표현하고 나누고 싶었던 걸까. 서로에게 진솔히 전하는 말들과 진심 어린 마음으로 행하는 돌봄은 둘을 더없이 가깝게 만든다. 그래서 마리가 고향인 고베가 아닌, 타지인 파리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낸 것이다. 자신을 든든히 책임져 줄 마리루의 곁에서, 매일 다른 희망을 발견해 가면서.
그렇게 마리와 마리루가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오가며 얘기를 나누던 순간들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 경험과 이론, 실무자와 학자의 논리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간호사와 원장은 요양원에서의 인터뷰 세션을 통해 환자를 향한 공통의 ‘진심’을 확인하며 마음의 벽을 허문다.
영화 속에서 두 번 진행되는 연극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토모키는 공연장 곳곳에서 소리와 몸짓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비장애인과 한 공간 내에 어울린다. 배우인 고로 씨가 거울을 통해 객석을 바라보며 말하고, 관객들이 나눠 받은 악기로 자유롭게 연주에 참여하면서, 무대 위와 아래의 경계도 희미해진 지 오래다.
앞으로의 ‘자유의 정원’을 위해 주최하던 회의들 역시 서로 다른 개인들의 만남을 마련한다. 정석대로 리스크를 줄이며 요양원을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존엄과 관계에 초점을 맞춰 다른 방식에 도전할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는 가운데,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이들은 자신들만의 답을 찾아간다.
이러한 장면들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이전 작품과 닮아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으로 애도와 위로를 전달하며 극 안팎의 대중을 감응시키던 순간이 떠오른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속 자신들의 땅과 자연을 무리한 개발로부터 지켜내려는 주민들의 마을 회의도 생각난다.
때로는 깊은 공감과 이입으로, 때로는 민주주의의 현장다운 미묘한 긴장감 속 이견과 합치로, 그는 여전히 ‘소통’의 가능성과 그 필요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곤 한다.
혼란 속에서 발견한 소망

한편, ‘자유의 정원’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장면도 있다. 마리가 진행하는 운동 세션은 자신의 ‘몸’을 이완하고 타인과의 스킨십을 장려한다. 보호자와 피보호자들은 서로 발을 맞춰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가거나, 하늘을 한 번 더 바라보거나, 상대의 이불과 침대가 되어주고, 그동안 고생했을 각자의 발을 조용히 마사지해 준다.
앞선 휴머니튜드의 실천과 함께, 하나의 명상과도 같은 이러한 활동들이 희미해져 가는 노인들의 정신과 주체성을 붙잡아 준 것일까. 요양원 내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들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방식을 천천히 익혀간다. 누군가가 넘어졌을 때, 그곳으로 다가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도움을 주려 하기도 한다.
덕분에 요양원에서의 연극에 토모키의 개입으로 발생한 작은 사고마저, ‘자유의 정원’ 식구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하나의 세션이 되어 ‘혼란’을 긍정적으로 승화한다.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이 자진해서 땅에 드러눕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그들의 발을 매만져 주며 한데 뒤엉킨 모습은 묘하고도 아름답다.
와중에 이전과 다른 마음을 갖게 된 듯한 아들도 보인다. 평생토록 고지식하고 제멋대로이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지금 그가 자진해서 낯선 손을 잡고 무리와 어울렸다. 또렷한 정신일 때도, 파킨슨병에 걸린 후에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건 같았건만, 이러한 변화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위안일까. 죽음을 앞둔 마리와 삶을 견디는 마리루가 온 힘으로 일군 이곳을 눈물과 포옹으로 지켜본다. 굳어진 편견과 비관 사이로 작은 틈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벅차오름과 용기. 조금은 낭만적이지만, 결코 과장하지 않는 시선을 따라가는 가운데, 관객에게 일렁였을 동함과도 닮아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살고 싶다, 오랫동안 머물고 싶다. 마리가 남긴 마지막 말과 함께 이 세계가 오랫동안 아른거린다.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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