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능한 사랑> [아시아의 장면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욕망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가능한 사랑>은 노동과 계급, 욕망과 이해가 엇갈리는 관계 속에서 타인을 향한 사랑의 가능성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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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가능한 사랑> [아시아의 장면들]
멀리서 미옥을 찍고 있는 예지. 그 낌새를 미옥은 알아챈다. 사진=넷플릭스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P 중공업 노동자들은 구조 조정에 의한 정리 해고를 당했다. 사모펀드의 인수를 위한 발판으로써 ‘비용 절감’을 피력하기 위해, 사 측이 전략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이러한 부당함에 대항하고자 이들은 옥쇄 파업에 나섰다. 처음에는 마치 작은 축제 같았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찌라시로 교묘하게 방해하던 기업과 현장을 가차 없이 제압하던 공권력에 의해, 이는 수포가 된다.

이후, 뿔뿔이 흩어진 노동자들은 회사에 복귀한 ‘산 자’와 복귀하지 못한 ‘죽은 자’로 구분되어 살아간다. 마음맞이 상담소의 심리치료에서 나온 한탄과 고백에 의하면, ‘죽은 자’들은 믿었던 ‘정의’의 배신에 몹시도 억울하고, ‘산 자’들과 마주하기 힘들며, ‘노동 귀족’에서 ‘빨갱이’로 전락한 본인의 신세를 조소하다가도, 연대하는 동안 느꼈던 ‘행복’의 몫으로 그 죗값을 단단히 치르는 기분이란다.

이 침울함 속 스스로 죽음을 택한 ‘죽은 자’가 발생한 날. 희생한 동기와 같은 노동자였던 호석과 그의 아내인 미옥, 그 현장을 스케치 중이었던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와 그의 남편 상우가 우연히 마주친다. 그리고는 <가능한 사랑> 속 또 다른 영화의 제작자와 등장인물로서, 조금은 불편하고 색다른 교류를 이어간다.

미옥, 욕망을 드러내다

예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미옥. 표정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사진=넷플릭스

미옥은 타고난 스토리텔러다. 그의 인터뷰는 듣는 이를 묘하게 빠져들게 한다. 숨김없이 과거를 복기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동안, 표정과 말투에는 진솔함과 벅차오름, 슬픔과 쓸쓸함이 깃든다. 파업 당시 직원 가족들 앞에서 뱉은 짧은 소감이 그곳의 분위기를 한껏 고취했을 만큼, 그의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는 취재 중인 예지를 연신 감탄시키는 센스로도 나타난다.

그 솔직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미옥은 예지의 삶을 선망한다. 늘 스캔하던 옷차림이지만 취재 중인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괜히 한번 훈수를 뒀다. 그러면서도 예지의 근사한 일상을 경험할 수 있다면 부러 거절하지 않는다. 말 편하게 하자는 말에 이름을 부르며 ‘미친년’이라 호기롭게 내뱉었던 것도, 그 여유로운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우를 향한 호감 역시 투명하다. 헐렁이는 결혼반지를 찾아준 낯선 이의 이름을 한번 듣고도 용케 기억해 냈다. 예지와의 첫 만남부터 ‘만인의 연인’과 어떻게 결혼했는지 궁금했고, 무엇이든 다 알 것 같고 해결해 줄 것 같은 자유로운 ‘스티브 잡스’에게 금방 매료됐다.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침묵은 미옥을 긴장하게 하거나 황홀하게 만든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서. 언행 하나하나에 설레곤 했다.

그러나 결국 선망과 호감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거리임을 체감한다. 완전히 망가진 남편의 모습을 끝까지 촬영하던 예지를 발견했을 때. 돈은 문제가 아니라며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상우의 자랑이 더 이상 달갑게 들리지 않을 때. 미옥은 차원이 다른 복수를 택한다.

사유지에서 누렸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듯 망설임 없이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우를 밀어내고 패배감을 준다. 마침내 성사된 호석의 인터뷰를 끊고, 여기까지라는 듯 카메라 앞을 막아서며 예지에게 허망함을 주기도 한다.

자기의 현실이 누군가에게는 이야깃거리에 불과하고, 누군가에게는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미옥은 끝까지 ‘존재감’으로 이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어쩌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이상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순간이기도 하다. 잘 들어갔냐는 예지의 문자에 답할지 말지는, 이제 미옥에게 달려있다.

상우, 욕망을 숨기다

자신의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차원이 달라진다'고 얘기하는 상우. 사진=넷플릭스

화면 중앙이든 언저리든 등장만 하면 상우 역시 ‘존재감’이 확실하다. 수풀 속에 떨어트린 반지를 찾는 미옥에게 차량 서치라이트로 도움을 주었던 그는 말 그대로 ‘빛’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기업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긴 채, 투자 전문 펀드계의 큰손으로 문화예술계를 지원하고 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예지의 뜻도 존중하며, 필요할 때만 나선다.

경찰이었다는 할아버지와 태권도를 싫어했다는 집안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친일로 축적된 재력과 권력의 배경 때문일까. 사업 성과든 관계 맺기든 상우는 막힘이 없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만큼,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하고 싶으면 해버리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회 평가 역시 거리낌없다. 그는 카타르의 거대한 인공 낙원을 움직이는 지하 세계의 노동력을 인지하고 있다. 자영업자던 장인어른을 ‘노동자’라 언급하자, 그분은 ‘민노총’을 싫어하는 ‘사장’이었다며 모순을 짚기도 한다. 동시에 미옥네와 같다고 믿는 훌륭한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지 않냐며, 아내의 노력을 단정한다. 호석을 향한 관심에는 알고 보면 ‘뻔한 해고 노동자’일 수 있다며 냉정히 선을 긋기까지 했다.

그래서 미옥네를 향한 상우의 관심은 아리송하다. 여전히 ‘챗지피티’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도, 꼭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친구가 되려’는 듯이 굴 때가 있다. 특히 그는 미옥과 기꺼이 시간을 보낸다. ‘푼수’ 같은 여성에게 끌린다던 예지의 증언대로 그를 데리러 가고, 함께 걸으며, 열창하는 곁에서 색소폰으로 장단을 맞춘다. 굳이 불필요한 말들이나 긴밀한 접촉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 집 아들 철이에게는 손수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풀린 운동화 끈을 직접 묶어주기까지 했다. 태권도는 호석과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것은 호석에게 싸움의 기반이었고, 상우에게 반항의 도구였다. 그들의 유사함은 자신의 가장 밑바닥이 내보일 때, 즉 인사불성의 상태일 때와 이성을 잃었을 때도 나타난다. 물론 상우는 재미로, 호석은 심란함에 취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편안하게 낯섦을 취하려 했던 그의 욕망은 좌절된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옥에게 거절당하고 각 집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날, 상우의 완벽해 보이던 삶에도 하나의 오점이 남았을까. 잠자리가 왠지 달랐다는 예지의 말에 그는 ‘나는 나’일 뿐이라고, 다시금 표정을 숨기고 얘기한다.

예지, 이해하려 다가가다

촬영과 함께 미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예지. 순간적인 이입과 공감이 느껴진다. 사진=넷플릭스

예지는 상상력이 풍부한 감독이다. 노동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상우의 말에, 코끼리가 사라지는 마술처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질문하게 됐다. 자신의 아버지가 세탁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더 와닿았던 것일까. 그는 AI로 인한 소외 대신, 대기업의 정리해고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노동자’ 문제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힘은 대상으로부터 나오기에, 미옥과 호석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일상을 함께하며, 돈독한 라포르를 형성하는 일. 카메라가 켜진 상태이건 꺼진 상태이건 예지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너하고 저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남편의 말처럼, 그가 사는 세계의 모습 때문에 이 다가감에는 어딘가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

현장에서 명품 가방을 들거나 비싼 옷을 입을 때. 미옥네를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가 사뭇 호화로울 때. 본인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받은 정부 보조금이지만, 덕분에 정말 '경제적 도움'이 필요했던 이들은 배제됐음이 드러날 때. 민식 씨와 조선족 주방 아주머니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리하는 여름 별장이 등장했을 때. 이 취재는 사뭇 껄끄럽게 느껴진다.

특히, ‘노동’을 다룬다면서 ‘단순 반복’하는 미옥의 업무 대신 ‘노조’ 만들기 에피소드에 더 관심을 보일 때. 어렵게 털어놓는 호석의 이야기에 다소 형식적으로 꼬리 질문을 붙일 때. 미옥네의 민낯을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끈질기게 따라붙을 때. 그동안 열심히 공감하며 인터뷰했던 장면들과 수없이 실천했던 ‘배려’에 물음표가 붙는다. 그저 작품을 위한 책임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결국 영화는 당사자성에 관한 질문을 곱씹게 한다. 당사자가 아닐 때,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를 다루는 이들은 어디까지 다가갈 수 있는지 혹은 다가가야 하는지. 물론 감독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여지를 아예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계층과 경제적인 계급은 상대적이고, 배경이 달라도 개인이 느낀 감정은 보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지는 ‘동네만 압구정’이었지 상우와는 급이 다른 집안이었다. 유학 시절에는 평소 받던 시급보다 많은 돈을 받기 위해 늦게까지 식당 알바를 한 적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지던 날 봤던 그 달이, 직장에서 도망친 미옥과 호석이 함께 월미도에서 보던 달이었겠다고, 예지는 넌지시 말한다. 물론 중졸의 신분으로 밥벌이를 위해 봉제 공장에 취직했던 미옥과 그의 상황을 동일하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 동갑내기는 언젠가 비슷한 시점에 ‘노동자’로 임했던 적이 있었다. 무장 경찰에게 속절없이 끌려가는 호석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감정 역시 거짓이라 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몸소 느낀 것들에서 출발해야, 필연적인 오해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조금이나마 타인과 닿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낯선 이를 이해하려던 예지의 시도를 그저 그런 실패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호석, 이해받기를 두려워하다

미옥과 함께 달을 보고 있는 호석. 여전히 밤에 술을 마시지만 미옥과 마시면 그래도 '달다'고 말한다. 사진=넷플릭스


호석은 영화 내내 겉돈다. 그는 동료의 장례식장에 다 와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상담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상담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원탁 테이블에 앉아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리에서도 자기 말을 시작하려다 말고 도망친다.

그는 두려워한다. 집안 마당에 대리석 식탁을 만들어 ‘동생’들과 함께 술 한잔 편히 마시려고 했던 씀씀이를 망가트린 사건. 매일 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과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사건. ‘투쟁’과 ‘희망’이 모두 거짓이고 ‘개소리’라 외치게끔 치를 떨게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현장에서 호석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자신은 맞고 있던 후배 대신 짓밟히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하던 시간과 달리, 정작 가장 절실했던 순간에 그는 홀로 남겨졌다. 그렇게 무력하게 배신당하며 끝난 연대의 기억에는 아직 못다 푼 울분이 남아 있다.

이제는 대리운전하고 있는 동생을 붙잡고 그날 구해줬는데 왜 자신을 피하냐고 묻고 싶다. 같은 처지인데 왜 해고 노동자들로부터 미움받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SP 중공업에 잘만 다니며 자기처럼 아이의 생일을 기념해 주는 이를 보고, 무작정 따라가 잠시 그 곁에 앉아 있었다. ‘화도 슬픔도 아닌’ 그저 내가 병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밀려오는 공허함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는 그는 자신이 ‘이런 놈’이라는 걸 가족에게 들킬까 무서워서 이를 숨겨왔다. 그래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애꿎은 이들에게 화풀이했던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뤄진 예지와의 인터뷰는 기어코 삼켜내고 싶었던 그 쓴물을 한순간에 쏟아내는 기회가 된다.

이는 만취해 남의 집 화장실 이곳저곳에 실수를 저지르는 엽기 행각과 새벽녘에 울부짖으며 숲속 이곳저곳을 망가뜨리는 안쓰러운 행위로도 이어진다. 마치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반영하듯이, 이제는 감출 수도 없다는 듯이. 미옥의 팔을 놓지 않는 상우에게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겨루기를 신청한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자신이 감춰온 모습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망칠까 염려하며 억누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기어이 강해 보이는 상대에게 달려든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며, 자신마저 남에게 이해받지 않으려 했던 호석은 그렇게 조금씩 움직인다.

불완전한 이해, 가능한 사랑

상우의 여름 별장 앞 사유지인 해변에 서있는 네 사람. 왼쪽부터 호석(설경구), 미옥(전도연), 예지(조여정), 상우(조인성). 사진=넷플릭스

감독은 극 속 다큐멘터리를 찍는 카메라와 극 자체를 찍는 카메라를 혼용한다. 인물들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 나오는 플래시백은 화자의 회상인지, 아니면 청자의 상상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의 기억과 누군가의 시선이 뒤섞이며, 영화는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준다.

이때 레나타 살레클의 사랑에 관한 논의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라캉의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상대에게서 단순히 그 사람 자체만을 보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 사람을 자신의 이상 자아가 놓이는 자리에 두고, 그에게서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나 나를 매혹하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상대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발견한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그렇기에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역설이 따라온다. 어쩌면 그 간극을 인정하고 끝내 다 알 수 없는 타인과 함께할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여름 별장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미옥네 가족. 가운데 철이가 보인다. 사진=넷플릭스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욕망하고, 어긋나며 관계를 맺는 사람들. 위태롭지만 묘하게 함께 하는 이들을 철이는 한 발 뒤에서 바라본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누군가를 지켜보는 것은 익숙하다. 두 가족의 낯선 만남과 흐트러질 정도의 친근한 분위기, 상반되는 성격에 갈등을 빚다가도 어느샌가 화해하는 부모의 대화를 놓치지 않는다.

언제나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나름의 ‘환대’를 조용히 실천하기도 한다. 그는 상우의 호의와 가르침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동시에 민식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그 일터에 스며든다. 예지네 여름 별장에서 나올 때는 상우가 민식을 부를 때 썼던 ‘후에’를 몰래 훔쳐 나왔다. 차 안에 울리는 그 호루라기 소리는 앞선 상하 복종에 경종을 울리는 아이의 놀이가 된다.

영화 초반에 차 안의 서글픈 대화를 훌훌 털어 보내듯, 창밖으로 콘칩 봉지를 놓으며 ‘날아간다’라고 말했던 것도 철이다. 그 뒤로도 엄마와 아빠의 술안주인 그 과자를 왜 그렇게 사수했던 걸까. 어쩌면 이미 어른들에게는 자연스러워진 불편함과 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려던 작은 임시방편이었을지 모른다.

말 한마디 없이 코를 찡긋거리며, 찜찜하고도 답답하지만, 비난보다는 안타까움과 은근한 기대를 하게 하는 상황들을 주시하는 제3자. 그는 메시지를 건네는 감독이자, 그 의미를 가만히 곱씹는 관객 같은 얼굴로, 타인을 수용하고 또 견디며 '가능한 사랑' 속에 존재한다.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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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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