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와 광통신망, 그리고 李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AI 선언’

한국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무한하진 않다. 중국 반도체가 무섭게 추격한다. 반도체를 인프라로, 서둘러 바꿔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출사표”엔 기대감과 함께 조급함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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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와 광통신망, 그리고 李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AI 선언’

7월 24일 저녁(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만 선착장 앞 한 레스토랑. 이재명 대통령이 넥타이를 푼 정장 차림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네모난 테이블 한쪽에 이재용·최태원·정의선 회장, 이해진 의장이 앉아있었다. 이 대통령이 가운데 앉았다. 맞은편엔 젠슨 황을 비롯, 혹 탄 브로드컴 CEO, 라니 보르카르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하드웨어 사장이 앉았다.

이 대통령이 “작년 성장률은 1% 근처였는데, 올해는 3%를 넘길 것 같다”며 운을 뗐다. 젠슨 황은 “한국은 정말 부유하다”라며 추켜올렸다.

이내 병맥주가 나왔다. 이 대통령이 일어나 건배사를 제안했다. “우리는 식구다.” 이 대통령이 “우리는”을 외치자 참석자들은 “식구다”라고 외치며 병을 부딪혔다.

이 자리를 만든 것은 반도체다. 지난 6월 반도체 수출액은 448억 2000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43.8%를 차지했다. 이 호황이 만든 자본과 협상력을, 데이터센터로 옮겨 심겠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의 골자다.

문제는 시차다. 한국의 반도체 우위는 영원치 않다. 한국이 메모리에서 중국에 앞선 기간은 3년 안팎으로 좁혀졌다는 것이 업계 평가다. 반면 데이터센터를 짓고 운영하기까진 5~7년이 걸린다. 칩이 벌어준 시간보다 AI 인프라가 늦게 온다.

대통령이 들고 온 숫자, 1375조원

이 대통령은 24일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대한민국은 대체 불가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도약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선언에는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AI 반도체 생산기지가 되고,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며 ▲AI가 제조공장과 도시, 물류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테스트베드로 거듭, 새로운 시장을 만들겠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요컨대 메모리반도체로 확보한 GPU(그래픽처리장치) 수급 협상력을 바탕으로 국내에 컴퓨팅 파워 인프라를 빠르게 공급하고, 빠른 공급을 바탕으로 새로운 수요를 먼저 키워내겠다는 게 이 대통령이 말하는 ‘AI 허브’의 핵심이다.

당장의 반도체 주문은 넉넉하다.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반도체 분야에서만 9500억 달러(약 1375조 원) 규모의 협력을 추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은 5년간 290조 원 규모 공급·파운드리 협약을 맺었고, SK는 엔비디아 등과 1085조 원 규모 장기 공급 협력을 추진한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센터 구축의 최대 병목인 GPU를 확보해 가고 있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와 최대 2GW(기가와트) 데이터센터 구축 및 베라루빈(GPU를 포함한 AI 컴퓨팅 플랫폼) 우선 할당에 합의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 투자 10억 달러와 브룩필드 인프라 지원 90억 달러를 묶어 100억 달러 규모 AI 팩토리를 짓기로 했다.

이렇게 확보한 GPU를 갖고 국내에서 AI 데이터센터 구축해 나간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은 지난 6월 말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 참석해 2029년까지 550조 원을 투입해 8.4GW의 데이터센터를, 2035년까진 1000조 원을 투자해 18.4GW의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계획대로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경우 한국은 글로벌 차원에서 봐도 상당한 컴퓨팅 파워를 확보하게 된다. 정부 관계자는 “2030년 아태지역 AI 데이터센터 규모는 58GW 수준으로 예상된다”며 “계획대로 확장할 경우 25%가량을 차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성공 문법

이 대통령의 구상은 생소하지 않다. 이미 성공해본 방식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부고속도로, 김대중 정부의 초고속정보통신망이 그것이다.

핵심은 이렇다. 첫째, 수요가 확인되기 전에 국가가 위험을 떠안고 물리적 기반을 먼저 깐다. 둘째, 깔아 둔 인프라가 국내 사용량을 자극, 세계 최대급 실증 환경을 만든다. 셋째, 그 환경에서 검증된 민간 제품이 수출 상품이 된다. 한국의 각종 공산품이 고속도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갔고,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갔다. 또 광통신망 위에서 자란 온라인 게임이 한국의 주력 콘텐츠 상품이 됐다. 질 좋은 인프라가 상품 개발 속도를 끌어올렸고, 비용은 낮춘 결과였다. 고속도로를 지을 때도, 광통신망을 구축할 때도 과잉투자 논란이 거셌지만, 정부는 규모와 속도를 밀어붙였다.

정부가 데이터센터를 보는 방식도 같다. 단순한 서버 시설이 아니라 반도체·전력·냉각·클라우드 기술을 묶은 ‘AI 데이터센터 솔루션’을 실증하고, 이 솔루션을 수출하겠단 것이다. 또 피지컬 AI 관련 응용 서비스도 키운다. 자율주행, 로보틱스, 공정 자동화 등 피지컬 AI는 데이터센터와 정보를 주고받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 소재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서비스에만 기댈 수 없는 것이다.

그간의 AI 모델 경쟁에선 이런 성공 문법이 잘 안 통했다. 가격과 출시 속도보단, 추론 성능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오픈AI, 앤트로픽 같은 모델 개발사는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경쟁을 벌여 왔다.

하지만 이제 개발사들도 수익 압박을 받고 있다. 성능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 비용이 너무 늘어난 것이 문제다. 이제 성능 경쟁은 기술력보다 인프라 경쟁이 됐다.

한 AI 업계 관계자는 “AI 모델 개발에서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AI 데이터센터 분야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정부는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돌아가는 건 6.3%

삼성과 SK가 180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산단과 데이터센터를 지으려면 2040년까지 27.7GW 규모 전력 설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신형 원전 20기에 해당한다. 현재 국내 가동 원전은 26기, 26GW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이미 2038년까지 10.3GW가 부족할 것으로 봤다. 계획된 송전망 건설 54개 사업 중 20개(37%)는 주민 반대와 인허가 지연으로 미뤄진 상태다.

해외 사정도 같다. JP모건에 따르면 미국에서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한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중 60% 이상이 전력 문제로 아직 착공하지 못했다.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 집계로는 전 세계에 발표된 초대형 AI 데이터센터가 777개, 190GW인데 정상 가동 중인 용량은 12GW로 6.3%에 불과하다. 건물을 세우는 데는 12~18개월이면 되지만 전력망과 송전망 연결에는 5~7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비용도 변수다. SK텔레콤의 15GW 구상을 산업용 전기요금 평균 단가로 단순 환산하면 연간 전기요금만 24조 원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전기요금이 데이터센터 운영비의 40~60%를 차지한다고 본다.

남은 3년

반대편 시계는 중국이 돌린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분석 기준 중국 CXMT는 3세대 16나노 DDR5를 양산 중이고 한국은 6~7세대 공정 단계로, 격차는 5년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CXMT가 HBM3 8단 양산을 추진하고 12단 투자까지 검토하면서 체감 격차는 줄었다. 최기영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현재 한국과 중국의 메모리 기술 격차는 3년 정도로 본다"며 "HBM3 수준까지는 비교적 빠르게 따라올 가능성이 있지만 HBM4는 추가로 2~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일정상 첫 대형 데이터센터 착공은 2028년 상반기, 가동은 2029년부터다. 전력망 연결에 5~7년이 걸린다면 완전 가동 시점은 2030년대 초반이다. 메모리 우위가 유지된다고 보는 3년 창을 이미 넘긴다.

OECD는 7월 초 보고서에서 반도체 수출 의존이 성장에 기여하는 동시에 "산출과 세수의 변동성, 전략적 취약성"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현대경제연구원도 반도체 슈퍼사이클 종료 시 내수와 외수의 동반 충격 가능성을 경고했다.

출사표

젠슨 황이 추켜올린 “부유한 한국“은 반도체 43.8%가 만들었다. 이 대통령의 AI 선언은 그 43.8%를 인프라와 운영 역량, 서비스로 갈아 끼우려는 시도다.

이 대통령은 26일 브라질리아에서 화상으로 수석보좌관회의를 열고 이번 선언을 “국가적 출사표”라며 재차 강조했다.

남은 건 검증이다. 주어진 시간 동안 몇 개의 데이터센터가 실제 가동되는지, 전력망이 그 속도를 감당하는지, 그 위에 몇 개의 한국산 서비스가 등장하는지. 고속도로와 광통신망에서 그랬듯, 인프라 선투자의 성패는 착공식이 아닌, 십수 년 뒤 손익계산서에서 판가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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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덕

문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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