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만세〉, 30년 전 타이베이에서 오늘의 고독을 바라보다 [아시아의 장면들]
놀이·허세·잠으로 외로움을 견디는 세 사람, 느림의 미학으로 다시 읽는 차이밍량의 영화
〈애정만세〉, 30년 전 타이베이에서 오늘의 고독을 바라보다 [아시아의 장면들]
놀이·허세·잠으로 외로움을 견디는 세 사람, 느림의 미학으로 다시 읽는 차이밍량의 영화
조예은 에디터
![〈애정만세〉, 30년 전 타이베이에서 오늘의 고독을 바라보다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167%2Fe57d707b4a554f75a2d95a6fcd9fed36.jpg&w=3840&q=75)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나 됐을까, 문득 이 작품은 유난히도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여성이 첫 마디를 뗄 때까지 화면 속 인물들은 그저 움직일 뿐이다. 타이베이의 푸르스름한 밤과 삭막해 보이는 낮을 지나며, 우리는 주인공으로 보이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들이 걷고, 뛰고, 안고, 눕고, 울부짖는 장면들을 보면서. 텅 빈 아파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로가 계속해서 엇갈리는 숨바꼭질을 지켜보면서.
‘놀이’로 나타나는 샤오캉의 외로움

봉안당 영업사원 샤오캉은 첫 장면부터 당돌한 짓을 저지른다. 평소처럼 전단을 돌리러 왔다가 관객의 눈앞에 바로 보이는 문고리에 꽂힌 열쇠를 훔쳐서 빈집에 숨어든 것이다. 사실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마지막이 될 하루를 여유롭게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런데 용기 내어 손목에 흠집까지 냈는데, 웬 낯선 남성(아룽)과 여성(메이)이 이 집에 덜컥 들어와 버린다.
그들이 열렬히 서로를 탐하는 모습을 훔쳐본 탓일까, 아니면 언제라도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뜩 든 탓일까. 샤오캉은 이후 몇 번이고 이 집에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속 ‘윌슨’ 같은 모양으로 파낸 수박에 키스하다가도 이내 처참히 먹어 치우거나, 검은 드레스를 입고 깃털 보아를 둘러본 채 춤을 추는 등 개인적인 놀이를 이어가면서. 거기엔 사회적 제약을 받는 갈망이 깃들어 있다.
회사 내 공동체에 섞이지 못해 그들의 놀이를 구경만 하던 샤오캉은 잠깐이었지만 자기처럼, 이 집에 숨어든 아룽과 퍽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함께 저녁을 해 먹으며, 빨래를 해주고, 서로의 일터도 방문하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어울린다. 그러나 퀴어인 샤오캉은 결국 아룽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그는 아룽이 침대 위에서 재미를 볼 때, 그 밑에 숨어 간신히 자신의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이처럼 영화는 계속해서 샤오캉의 외로움과 망설임, 회피와 단절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놀이는 때로는 즉흥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이지만 결국 적극적인 욕망 해소에는 실패한다. 곤히 잠든 아룽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남몰래 조심히 입 맞춰 보는 정도가 샤오캉에게 허락된 전부다. 차가운 사회 속에 고립되어 철저히 그 존재가 지워지는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잡아보려는 슬픈 시도만이 남은 것이다.
‘허세’로 나타나는 아룽의 방황

노점상인 아룽은 멀끔한 외양과 여유로운 미소로 오늘 밤을 함께할 여성을 탐색하곤 한다. 구애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인 시선을 보내고, 그가 지나다닐 길목을 일찌감치 선점하기도 하지만, 한껏 속도를 늦추는 꾀도 갖췄다. 마치 자신은 실패한 적이 없다는 듯 능숙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도 메이에게서 열쇠를 빼돌려 몰래 이 집에 들어왔고 다른 사람 소리에 매우 놀랐으면서, 막상 마주친 샤오캉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한다.
사실 아룽의 이런 허세는 그만의 생존 방식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밤마다 트렁크에 한가득 옷을 실어 다니고 단속이 뜨면 벌여놓은 장사판을 급히 정리해야 하지만, 그는 자신을 수입도 하는 사장이라며 ‘사업가’로 포장한다. 여러 개의 동전을 넣어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영 바쁜 티를 내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은 당장의 하룻밤을 묵을 공간을 가진 사람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에 불과할 때도 있다.
물론, 앞선 샤오캉과는 달리 아룽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즉각적인 갈증을 채우곤 한다. 불안한 일자리를 가진 불법 거주민의 신세지만 그 티가 나지 않으니 소외된 계층으로 인지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영화 속 다른 인물들과 동일하게 그가 맺는 관계는 다소 얕다. 아룽은 수화기 너머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고, 호방하게 대한 친구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며, 격렬한 섹스 이후엔 어김없이 다시 혼자로 돌아간다.
샤오캉과 함께 방문한 봉안당에서 직원이 2인실을 홍보할 때, 죽더라도 ‘마작을 함께 할’ 상대는 필요하지 않냐며 농을 친 것처럼, 아룽은 최소한의 삶과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와 잠깐의 동행을 지속한다. 마치 사회적인 가면을 쓰듯, 그의 허세 어린 방황에는 이런 서글픈 이유가 숨어있다.
‘잠’으로 나타나는 메이의 공허함

부동산 중개인인 메이는 매일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는 공실인 아파트를 매매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 고군분투하곤 한다. 혼자서 매매용 광고판을 붙이고, 업무 전화를 소화하고, 대답 없는 손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새 잠이 드는 것이다.
이때의 반복적인 잠과 이를 둘러싼 상황은 메이의 무기력함을 짐작하게 한다. 자신의 욕구를 풀어줄 남성과 하룻밤을 갖더라도 아침이 되면 혼자가 된다. 일하다 빠져든 깊은 낮잠에 자기가 누운 침대 밑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한다. 퇴근 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쪽잠을 청했지만 온수기의 이상으로 다시 홀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상에 외로움과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순간들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시작할 의지는 없다. 다만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렀을 때, 메이의 마음 한편에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튀어나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낯선 남성과 몸을 섞고 새벽녘에 일어난 메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조용히 문밖을 나선다. 그러고는 정처 없이 떠돌며 은연중에 공허함을 드러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서러움을 터뜨린다.
공사 중으로 어수선한 한복판에서 그 기나긴 울음을 목격할 때, 이는 인물의 심란한 마음속을 투영한 하나의 장면이 된다. 다 헝클어진 머리로 멈출 듯 말 듯 계속해서 오열하는 모습을 감독은 왜 오랫동안 주시했을까. 멀쩡한 겉과 달리 망가진 속을 드러내려고. 세련된 도시인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풀이와도 같은 흐느낌을 쏟아낼 때, 마침내 메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비록 이 순간이 찰나일지라도. 어쩌면 이 모습과 소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배경음악을 배제한 채 디제시스 내의 생활 소음과 몇 없는 대사만을 담으며 긴 침묵을 지켜왔는지 모른다.
다시 꺼내보는 차이밍량의 ‘슬로우 시네마’

차이밍량 감독이 1994년에 이 영화를 만들었을 무렵, 대만 영화계는 198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뉴웨이브의 흐름 속에 있었다. 당시 대만은 국민당의 권위주의 통치와 검열 아래 놓여 있었고, 한편으로는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사회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82년 〈광음적 고사〉나 1983년 〈샌드위치 맨〉과 같은 옴니버스 작품을 시작으로,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에서 벗어나 동시대 대만의 일상과 사회, 역사를 화면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영화가 다루는 주제 역시 더욱 다양해졌다. 1990년대에는 차이밍량을 비롯한 이른바 뉴웨이브 2세대 감독들이 등장했다. 앞선 세대가 사회와 역사의 변화 속에서 개인을 바라봤다면, 이들은 현대의 도시와 일상, 가족과 관계, 성적 정체성과 소외처럼 보다 내밀한 문제에 시선을 기울였다. 최근에는 그 시절, 사회 속에서 고립되거나 욕망 속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인간을 다룬 작품들이 종종 극장에 오르곤 한다.
가령, 2025년 1월 에무시네마에서는 ‘에드워드 양 기획전’을 통해 <타이페이 스토리>, <독립시대> 등을 상영했고, 〈하나 그리고 둘〉은 11월에 열린 ‘제2회 서울아트하우스영화제’에서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에서 최초 상영됐으며, <마작>도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국내에 정식 개봉했다.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은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에 소개됐으며, 허우샤오시엔의 〈해상화〉 역시 2024년 12월 재개봉한 〈밀레니엄 맘보〉에 이어 2026년 2월 국내에서 처음 개봉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약 30년 전에 만들어진 <애정만세>가 오늘날 가지는 동시대적 의의는 무엇일까.

죽은 사람이 안식을 취할 ‘집’은 많아도 정작 산 사람이 뿌리내릴 집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누군가는 혼자 누리기에도 넓은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자기 방 하나가 없어서 떠도는 이들도 있다는 것. 마음의 여유를 잃은 개인들은 점점 더 간편하고 즉각적인 관계를 택하곤 하지만 그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피상적인 교류만이 남은 지금의 풍경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과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
이처럼 각자가 수많은 해석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슬로우 시네마’의 미학이 아닐까. 슬로우 시네마의 관객 경험을 연구해온 영화학자 야콥 보어는 이러한 관람을 능동적인 집중과 수동적인 표류가 오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관객은 영화에 주의를 기울이다가도 자기 생각으로 흘러가고, 다시 화면으로 돌아오며 각자의 방식으로 의미를 발견해 나갈 수 있다. 롱테이크를 활용한 쇼트들로 관찰하듯 장면을 포착하니, 속도와 과잉 자극에 익숙해진 시선에서 잠시 빠져나와, 각각의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제삼자의 자리에서 현대인의 고독한 삶을 바라보게 하는 <애정만세>는 시간과 장소를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애정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한다.
이 기사 공유하기:
조예은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