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오디세이>의 결말을 바꿨을까

<오펜하이머>에서 <오디세이>까지, 인간의 죄책감과 폭력성, 그리고 문명의 순환에 대해 크리스토퍼 놀란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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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오디세이>의 결말을 바꿨을까
2026년 4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크리스토퍼 놀란.사진=데빈 얄킨(TIME 제공)

올봄, 나는 오랫동안 기대를 모아온 <오디세이> 각색작에 대해 크리스토퍼 놀란과 이야기를 나눈 최초의 기자 중 한 명이었다. 이제 영화는 개봉했고, 놀란 감독의 작품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오프닝 성적을 기록했다.

첫 번째 인터뷰에서 놀란은 <오디세이>의 결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결말부의 반전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관객에게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또한 자신의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인셉션>에서 코브의 아이들이 실제인지 상상 속 존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영화 개봉을 얼마 앞두고 다시 전화로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의 결말부에 관한 대화를 나누자, 그는 이 서사시를 각색하면서 왜 몇 가지를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들려주었다.

우리는 <오디세이>와 <오펜하이머>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평행선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주어지지 않았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행복한 결말을 왜 선사하기로 했는지, 그리고 젠데이아가 연기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실제로 여신일까, 아니면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현현일까? 또한 제우스의 법과 헬레네의 상처 난 얼굴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Q 오디세우스는 PTSD를 앓는 인물이고, 감독님의 해석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살아가던 윤리적 규범을 자신이 어겼기 때문에 한 문명의 종말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오펜하이머>에서 그랬듯이, 한 명의 영웅을 내세웁니다. 오펜하이머는 온갖 결점과 복잡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죠. 그런 캐릭터와 함께 관객을 여정으로 이끌어가면서, 그 인물과 함께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그를 판단하지 않는 배우를 찾아내는 겁니다. 그런 다음 그 캐릭터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묻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번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통해 그렇게 합니다. 시에서 대충 넘어가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지휘 아래에서도 선원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과정이에요.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이 들죠. “이거 꽤 흥미로운데. 이 부분을 좀 더 이야기의 중심에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어떤 관계일까? 그가 자신들을 이끄는 방식과 자신들에게 닥치는 일들을 선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목마죠. 그러니까 우리 영화에서는 시작부터 일종의 비극적 결함을 지닌 인물인 셈입니다.

<오디세이> 촬영 현장 속 오디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 아테나 역의 젠데이아와 함께한 놀란. 사진=멜린다 수 고든(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Q 젠데이아가 연기한 인물에 대한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처음에 소개하는 아테나가 아닙니다. 이 세계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는 오디세우스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현현입니다. 트로이 함락 당시, 우리는 아테나 신전의 여사제인 그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리스인들은 그의 목을 베어버리죠. 오디세우스에게 그는 목마가 세상에 불러온 혼돈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제 편집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군요. 우리의 의견 차이를 해결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 질문에는 도저히 답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메멘토>를 만들면서 아주 일찍 깨달은 게 있는데, 이런 질문에 답함으로써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있습니다. 저에게 중요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신을 바라봤을 법한 방식으로 우리도 신들을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그들은 자연 속에서 신의 증거를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신과 신의 영향력을 찾고 발견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이렇게 말하죠. “인간에게서 신을 찾지 마라. 결국 실망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제가 보기에 오디세우스가 신의 존재에 대해 하는 말 중 일부는 이를 지나치게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립니다. 자신의 본능과 자신이 해온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인 거죠.

Q 오펜하이머와 오디세우스 사이의 평행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고, 엄청난 파괴를 초래할 도구를 만들어낸 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싸우죠. 맷 데이먼에게 처음 각본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더니, “<오펜하이머> 같았다”라고 답하더군요. 의도적으로 선택한 연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제가 영화를 제대로 만들었다면, 그 영화는 제게도 질문을 남겨요. 계속 탐구하고 생각해 보고 싶은 것들을 남겨두죠.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제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읽고 해석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친구 에우마이오스를 연기한 존 레귀자모가 영화 초반에 이렇게 말하죠. “아주 영리한 생각이지만, 그 영리함이 당신을 곤경에 빠뜨릴 겁니다.” 실제로 그의 영리함은 끊임없이 그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펜하이머>와 연결되죠. 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할지 고민하면서 저에게는 두 작품 사이의 평행선이 꽤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Q 영화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제우스의 법’을 파괴한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에서 사용하는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제니아(xenia)’라는 개념, 즉 주인과 손님 사이의 존중에 기반한 관계를 뜻하죠. 현대 관객에게 설명하기에는 다소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영화에 포함하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런 부분들을 다루기 어렵다면, 때로는 그냥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것을 이야기의 전부로 만드는 게 해결책일 수 있어요. 저는 ‘제니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관객에게 너무 많은 용어를 던지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황금률과 같은 개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날씨와 지리로 돌아갑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게 되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여행한 끝에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먹을 것과 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필요하죠. 3천 년 전에는 그것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낯선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에 의지해야 했어요. 그러므로 낯선 사람이 변장한 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신앙 체계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토대입니다.

<오디세이>에서 트로이 함락 장면을 촬영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사진=멜린다 수 고든(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Q 영화의 여러 지점에서 인간은 기회가 있으면 야수가 된다는 생각이 드러납니다. 한 병사가 여사제의 목을 베기도 하죠.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의 얼굴에 의도적으로 상처를 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헬레네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시는 다른 사람이 그녀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요.

“천 척의 배를 출항시킨 얼굴, 아니 어쩌면 고작 500척이었을지도 모르지”라는 대사는 그냥 문득 떠올라서 쓴 거예요. 작가로서 글을 쓸 때는 순전히 본능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죠. 저는 이 시가 메넬라오스가 헬레네를 데려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고 느꼈어요.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그 관계가 끔찍하고 서로에게 독이 되는 결혼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요?

Q 신화에서처럼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의 얼굴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죽일 수 없겠다”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는 건가요?

두 사람 사이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저는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과 그 전쟁이 온 세상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함축해서 보여줄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Q 인간이 야수가 된다는 생각은 키르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자신을 강간하고 죽였을 거라며 그들을 돼지라고 말하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트로이 함락 장면과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보게 됩니다. 키르케의 말이 옳았던 셈이죠.

키르케는 영화에서 그 점을 아주 잘 표현합니다. 사만다 모튼이 그 역할을 연기한 방식이 정말 좋아요. 각색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이 시의 결말은 너무나 암울하고 여성 혐오적이어서 그중 일부는 영화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성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전쟁을 벌이는 방식에 대해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영화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싶지 않았어요.

Q 그런데도 감독님은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에게 시에는 없는 행복한 결말을 선사했습니다.

글쎄요, 문명의 몰락을 다루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당히 암울한 정서가 깔려 있습니다. 결말에서는 순환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죠.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 순환에는 낙관적인 면도 있습니다. 페넬로페가 말하듯이 “문명은 다시 일어날 겁니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자라나는 것이죠.

저에게는 결말을 바라볼 때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재앙을 촉발했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시선을 견지하면서도, 결국 긍정적인 것들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낙관을 함께 담고 싶었어요.

글 Eliana Dockterman

한국어판 편집 조예은 에디터

이 기사의 원본보기: Christopher Nolan on Helen, Athena, and His New Ending for The Odys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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