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 가족으로 뭉친 기행(奇行)의 끝에서 [아시아의 장면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 복수와 애도를 지나 다시 각자의 길로 향하다.
<경주기행>, 가족으로 뭉친 기행(奇行)의 끝에서 [아시아의 장면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 복수와 애도를 지나 다시 각자의 길로 향하다.
조예은 에디터
![<경주기행>, 가족으로 뭉친 기행(奇行)의 끝에서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181%2Fc6d11aa3887b442ba531796ad3fb36d5.jpg&w=3840&q=75)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2006년 조나단 데이턴의 작품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는 막내 올리브의 꿈인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 출전을 위해 가족 모두가 노란색의 낡은 고물 버스를 타고 여정을 떠난다. 2026년 김미조 감독의 영화 <경주기행>에서는 8년 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의 복수를 위해 가족 모두가 노란색의 낡은 봉고차를 타고 ‘경주’로 향한다.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출발한 두 가족 여행은 피식하고 웃게 하거나 ‘아이고’ 하며 탄식하는 순간들을 경유하고, 오랫동안 곪아있던 상처들을 서서히 마주하다, 마침내 변화를 맞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는 전작과 달리, <경주기행>은 다시는 못 볼 막내딸을 엄마 홀로 배웅하며 다소 마음이 미어지는 결말을 맞는다.
이러한 갈림길을 만드는 것은 ‘가족이라는 환상’과 ‘사적 제재’ 또는 ‘용서의 문제’인데, <경주기행>은 이를 다뤘던 국내 작품 중 몇 갈래의 계보를 이어가는 영화다.
가령 <괴물> 속 가족은 평범한 가정도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위험에 맞서며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세자매> 속 자매들은 같은 과거를 공유함에도 각자의 기억과 상처가 다르기에 삶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마더> 속 엄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비틀리고 광기에 치달을 수 있는지를 실천한다. <밀양> 속 엄마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과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지를 반문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경주기행>은 용서하지 않기로 다짐한 한 가족이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는지, 어디까지 폭주하다 끝내 브레이크를 밟는지를 따라간다.
‘FAMILY’라는 단체 티가 무색해지도록

옥실, 장주, 영주, 동주 그리고 무일과 경주. 이들이 단결한 것도, 분열한 것도, 낯선 사람 백상현 때문이다. 그는 이유 없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경주를 죽게 했으나, 초범이고 범행을 뉘우치며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무일은 자기 딸을 두 번 죽이지 말라며 법원 건물에서 투신했고, 이 모든 일을 순식간에 겪어버린 경주네 가족은 목표가 생긴다. 반드시 백상현을 죽이겠다고.
아니 사실, 이 목표는 크나큰 충격과 분노에 휘말려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옥실을 위해 딸들이 함께 뛰어든 ‘작전’이다. 늘 소란스러운 집안을 어떻게든 이끌려는 장주도, 온갖 변수를 따지며 치밀하게 계획하는 영주도, 연신 일을 그르치는 듯하지만 결국 행동대장인 동주도, 모두 엄마의 슬픔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
장주는 그간 많이 참았다. 아빠의 장례식이 진행될 무렵부터 맏이는 책임이 막중했다. 합의로 형량을 8년까지 줄이고, 범죄자를 직접 벌하겠다며 혈안이 된 엄마 때문에, 상주부터 가장 노릇까지 도맡았지만 군말 없이 움직였다. 고마움이 담긴 칭찬 한번 못 들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엄마를 달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에게도 지켜야 할 제 가족이 있다. 그들과 자신을 위해,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 그만 행복해지고 싶다.
영주는 습관처럼 체념하곤 했다. 첫째나 막내가 아닌 둘째라서 알아서 잘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집안이 가난해서 하고 싶었던 법 공부도 끝마치지 못했다. 평소에 이를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았을 그는 함께 떠난 와중에도 종종 거리감을 내보인다. 매사를 논리적으로 따지고 그 대가로 ‘돈’을 운운하는 모습은 제법 냉정하지만, 그 안에는 이 시도 자체에 대한 비관뿐 아니라, 그동안 받은 상처들로 생겨버린 마음의 벽이 있다.
동주는 자주 서운했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챙김을 받던 막내가 질투 났고, 프로레슬링 선수인 자기와 공부를 잘하는 언니가 비교되는 것도 자존심 상했다. 최근 들어 자기에게만 뭐라 하는 엄마의 태도도 섭섭하다. 물론, 그는 느끼고 있다. 괜히 자기가 떼를 써서 경주의 수학여행지가 바뀌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게 아닌가 싶은 죄책감.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더 나았을까 하는 부채감. 그래서 그렇게 매사 앞장섰던 것일지도 모른다.
옥실의 삶은 멈춰버렸다. 하루아침에 딸과 남편을 잃고 나니 남는 건, 그리움과 복수심뿐이다. 그런데 모두 같은 마음인 줄 알았던 식구들이 조금 의심스럽다. 갑자기 대열에서 이탈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질 않나, 이 계획은 무리라며 사위와 손녀를 끌어들여 방해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 남편의 애마를 고물차라며 마음대로 처분하려 하고, 아예 백상현을 몰래 풀어주기까지 한다. 딸들과 함께 있긴 하지만 점점 더 고립되는 기분이다.

“가족 일에 무슨 논리가 필요해”라는 말만큼 무서운 말이 있을까?
그래도 가족이라서 이 답답함과 지긋지긋함, 속상함을 안고도 이만큼까지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이 겪은 상실의 고통이 너무나도 크고, 항상 곁에 있던 사람들이 무너지길 원치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사랑에 따른 이해가 절대시 되는 집단이니까.
그러나 때때로 가족은 누군가에게는 족쇄로, 폭력으로, 결핍으로 작용한다. 해야만 하는 말을 삼키게 하고, 어떤 역할을 감내하게 하며, 내면의 발작 버튼을 만들어 버린다. 남인데도 나인 것처럼 속단하고 혈연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그래도 괜찮은 사이로 단정 짓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라는 믿음은 말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갈등을 낳는다.
‘가족’이라는 환상은 구성원들이 그 사실을 마주하고 반기를 들 때 비로소 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주기행>은 그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가 섞인 초반과 달리 중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점점 무거워지는 건, 복잡한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완고해진 옥실을 견디던 딸들은 하나둘씩 말 못 할 사정을 끄집어내며, 오랫동안 유지되던 수직적 위계에 균열을 낸다.
이후 감독은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고백과 희생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물론 현실이 그렇듯, 모녀 간의 완벽한 이해와 화해의 결말이 주진 않는다. 대신 서로를 향한 후회와 미안함만은 진실되게 전달된다. 결국 가족 때문에 떠난 이 기행은 ‘가족’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여정이 되어, 덩그러니 개인들을 남겨둔다.
불문율을 깨트린다는 것

한 목숨의 무게.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가해자건 피해자건. 생명 자체로 본다면 감히 그 둘의 무게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경주네의 복수는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됐을 때부터 이들은 납치된 백상현을 손에 넣었지만, 아무리 살인자라 할지라도 아무도 그를 바로 죽이진 못했다. 그가 끊임없이 풀려나고 도망가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이는 분명히 저질러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이고, 이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이 경주의 식구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감독도 규범적으로든, 양심적으로든 하면 안 될 일을 벌이고 있다는 듯, 그 지점을 계속해서 건드린다. 가족들이 치밀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철저히 계획대로 진행하려 하는 가운데, 자꾸만 이를 망칠 변수를 등장시키고, 일련의 사건을 발각시킬 거리를 만들어 서스펜스를 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꿈틀거리고 애원하고 울먹이는 백상현의 모습을 영화는 부러 지우지 않는다. 나중에는 그가 여전히 포악한 살인범이고 먼저 경주네 가족을 죽일 계획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를 처리해야 한다는 정당한 명분을 주긴 하지만, 그 과정 자체도 지난하게 진행된다.
가령, 옥실은 범죄자를 굳이 등에 업고 힘겹게 산에 기어 올라가서, 다소 심란하게 그의 마지막 생전 모습을 마주한 뒤 다시 힘겹게 그를 처형한다. 자신의 무게로 지렛대 삼아 그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등가교환의 법칙과도 같다. 복수를 위한 그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옥실의 손목에 칭칭 감겨있던 묵주가 끊어지고 명주실 같은 매듭으로 자신의 허리를 칭칭 동여매는 순간은, 그간 참아왔던 인고의 시간은 비로소 끝나지만, 살생으로 인한 책임의 시간은 이제 시작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윤리적인 딜레마를 마주하게 하면서도, 결국 사적 제재를 실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법의 틈에서 빠져나가는 중범죄자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할 카타르시스를 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권선징악이라 하기엔 쉬이 떨쳐지지 않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범죄도시> 시리즈나 <발레리나>처럼 개인의 응징을 하나의 어트랙션처럼 풀어낸 작품들과는 달리, <경주기행>은 막이 내린 뒤에도 영 개운하지가 않다.
“너를 용서할까 봐 무서웠어.” 옥실은 백상현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감독은 감히 그 응어리를 헤아려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답을 내려놓고 본능적으로 그 마음에 다가가 보는 것이다. 우리에겐 용서하고 싶지 않은, 용서할 수 없는 순간도 있음을. 깊이 망가진 사람들은 기어코 자신을 활활 태워 재가 되어야 비로소 다시 숨 쉴 수 있음을, 영화적 허용으로라도 전해보면서.
생사의 기로에서 건네는 인사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애도를 끝내 마칠 수 없는 과정으로 보았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는 동시에, 그가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존재임을 마주하는 일. 애도는 어쩌면 그 모순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고의 억울한 희생자들을 둔 부모의 심경이 떠오르는 가운데, 모든 수난이 끝나고 혼자 재판석에 앉아 있던 옥실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경주를 마주한다.
아마 몇 번이고 곱씹었을 경주의 마지막 모습. 평소와 같이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딸을 차마 붙잡진 못하고, 그의 투정과 애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간다. 그러고는 건네지 못한 많은 말들을 눈물과 함께 삼키며,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다른 가족들이 자신을 기억하며 올랐을 공동묘지 위의 쉼터를 지나, 막내는 이들과 함께했던 가파른 언덕 위의 안락한 보금자리로부터 자전거를 타고 내려간다. 이전 꿈과 다르게 얼굴을 비춘 경주는 제 뒤에 서 있는 엄마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는 곧 옥실이 그를 보내줄 준비를 마쳤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또 다른 기행(紀行)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 기사 공유하기:
조예은 에디터


![〈애정만세〉, 30년 전 타이베이에서 오늘의 고독을 바라보다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167%2Fe57d707b4a554f75a2d95a6fcd9fed36.jpg&w=3840&q=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