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당신을 바꾼다면, <스파이의 아내> [아시아의 장면들]

전쟁이라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 구로사와 기요시는 <스파이의 아내>를 통해 사회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욕망을 연극적 형식과 멜로, 스릴러의 장르적 긴장으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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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당신을 바꾼다면, <스파이의 아내> [아시아의 장면들]
<스파이의 아내> 속 미국으로의 밀항을 앞두고 발각된 사토코.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영화 <스파이의 아내> 속 흑백 영화로 상영되고 있는 사토코의 모습. 사진=<스파이의 아내> 캡쳐

흑백 화면 속 어느 귀부인이 몰래 금고로 다가간다. 손전등의 불빛에 의지한 채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이윽고 그는 비밀의 문을 연다. 그러나 그 순간, 이를 제지하는 누군가가 있다. 남편인지 동료인지 모를 그 사람은 빛 가운데로 여성을 끌어낸다. 이후 묘한 대척이 이어지고, 남성은 떠나가는 상대의 뒷모습에 총구를 겨누다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그렇게 쓰러진 당사자는 이내 자신을 품에 안은 그 얼굴을 슬프게 매만진다.

영화 속의 무성 영화로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스파이의 아내> 속 사토코와 유사쿠의 이야기와도 닮아있다. 극 중 초반, 남편인 유사쿠가 아내인 사토코와 그들의 조카인 후미오를 직접 촬영한 내용인데,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앞으로의 일들을 예견한다.

사토코는 유사쿠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지고, 유사쿠는 그 사실을 늦지 않게 알아챈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유사쿠가 이를 숨겨왔다는 걸 아는 사토코는 자신도 뜻을 같이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께 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후반에 사토코가 유사쿠에게 배신을 당하고 끝내 홀로 남기 전까지는.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까지

영화 <스파이의 아내> 속 자국의 만행에 대한 밀고를 두고 대립하는 사토코와 유사쿠. 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영화 속 배경인 1940년대 일본은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이에 국가는 국민에게 국수주의적인 생활을 강조한다. ‘국민복 착용령’을 내려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게 하고, 국내에서 자급자족하는 환경을 지향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던 것. 또한, 일본의 동맹국이 아닌 나라들을 배척하면서 외지인을 조사하고 이들과 교류하는 자들을 주시하는 등, 혹시 모를 내통을 엄격히 잡아내기 시작한다.

무역가 유사쿠는 이에 개의치 않는다. 여전히 양복을 즐겨 입고, 자신의 거래처인 영국 사람이 잡혀 들어갔을 때는 보석금을 내서 빼낼 정도다. 사업가로서 ‘적대국’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군의 행진과 반대 방향으로 걷곤 하는 모습은 그의 정치 성향을 암시한다. 그런 그가 후미오와 함께 출장 차 떠난 만주에서 자국민이 일으킨 참변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를 필름으로 찍어 돌아온다.

각 컷에는 누군가를 수술하는 듯한 모습과 환히 웃는 의사들, 체포당하거나 죽임당한 많은 사람이 담겨있다. 유사쿠는 관동군이 세균 무기로 흑사병을 퍼트렸고 생체 실험을 진행했으며, 그 증거가 실험 노트라고 얘기한다. 그는 이를 가지고 있던 군의관의 내연녀인 히로코를 영역본과 함께 미국에 보내 국제 정치의 현장에서 이 내용을 발표하려 했다.

그러나 국가의 철저한 감시 때문인지 같이 귀국한 히로코는 금방 죽고, 그를 숨겨주며 노트의 번역을 진행한 후미오는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여기서 놀랍게도 후미오를 고발한 건, 대망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 여긴 사토코였다. 처음에 그는 타이지가 흘린 말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에, 남편이 외도로 변했고 동포와 자신을 저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이후 자국이 저지른 만행의 결정적인 증거들을 목격하며 생각이 바뀐다.

“당신이 스파이라면,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 이후 사토코의 다짐 하에 두 사람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국으로의 망명을 계획하고, 회사의 현금을 귀금속으로 바꿔 경비를 마련한다. 혹시 몰라 각각 가져가는 증거와 서로의 루트는 다르게 짰다. 가정부 코마코에게는 2주 정도의 여행이라고 말해둔다. 그러나 누가 밀고했는지, 결국 사토코는 타고 가려 했던 배의 화물칸에서 붙잡힌다.

충격적인 것은 사토코가 가지고 있던 필름의 정체다. 타이지와 수많은 일본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사기는 이전에 유사쿠가 놀이로 촬영했던 그 단편 영화를 상영한다. 진실을 알게 된 아내는 미친 듯이 웃는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안개 속으로 사라진 남편을 생각하면서. 이후 뜬소문만 가득 남긴 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945년 3월, 결국 일본의 패망이 찾아온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사토코는 폭격으로 난리가 난 틈에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불바다가 된 고베 땅을 보는 그의 눈빛은 심란하다. 이후 환자복을 입은 그는 흐트러진 모양새로 해안가를 마구 달린다. 어디를 향하는 건지 누구에게 쫓기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복잡한 심경으로 사무치듯 오열하는 모습만 이어질 뿐이다.

‘연기’하는 사람들의 드라마

영화 <스파이의 아내> 속 사토코는 유사쿠가 세워놓은 체스판을 넘어트리고 다시 황급히 세워놓는다. 사진=<스파이의 아내> 캡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제77회 베니스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관계, 그 공존과 대립의 구조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로 1940년대의 일본을 택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내재적인 대립이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전시의 일본에서는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규칙이 명확해 그 갈등을 비교적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연극적인 형식으로 시각화한다. 표현주의적인 배우들의 말투와 행동, 전경과 후경의 구분 속에 배치되는 인물과 사물. 특히 두 사람이 한 화면에 잡힐 때 둘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마치 정해진 동선과 위치가 있다는 듯 반복되는 형식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장면이 인물들의 ‘연기’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자신의 의중을 감추면서도 상대를 읽고 목표한 것을 이뤄야 하는 체스판 같은 현실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필수적이다. 부부, 친구, 가족, 동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또 서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싸움이 계속된다. 결국 각 인물이 맡은 역할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수행하고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역할’이 된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 속 국가의 충성을 '연기'하며 타이지를 찾아간 사토코. 평소와 달리 기모노를 입고 있다. 사진=엠엔엠인터내셔널

사토코는 ‘14살 소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자신을 경계하는 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거나, 유사쿠와 히로코의 관계를 의심해 악몽까지 꾸는 등 유약함을 보인다. 그러나 ‘스파이의 아내’로서는 남편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큰 꿈’을 위해 자신을 가장(假裝)해 가족을 버리거나, 홀로 남겨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등 담대함을 보이기도 한다.

유사쿠는 ‘코스모폴리탄’으로서 자신이 충성을 서약한 것은 ‘국가가 아닌 만국 공통의 정의’라며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가장 대신 불의를 묵과하지 않는 ‘운명’을 받아들이려 한다. 타이지는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체포를 내켜 하지 않았고, 원래 마음씨가 고운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매국노’라면 그 상대가 남몰래 자신이 흠모하던 여성이더라도 냉철히 잡아내는 헌병 분대장이 된다.

이들은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성향에 반하는 선택을 하거나 신념에 충실히 임하며, 저마다의 사회적 소임을 다한다. 그중 단편적으로 보이는 어느 면도 인물의 전부라 할 수 없다. 그 이면의 균열까지 모두 읽어낼 때 비로소 그들의 입체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감독은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 둘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번 작품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서스펜스는 중요한 사실을 전달할 때 가빠지는 대사의 호흡과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생활 소음의 울림, 인물들의 두려움이 드러나는 상황의 끈질긴 주시에서 나온다. 멜로와 스릴러의 장르적 복합성은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관계의 긴장감을 엇갈리는 대화에 담아내거나, 각 인물의 내적 갈등이 드러나는 미묘한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구축된다.

그렇게 <스파이의 아내>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위에 올라타기도, 또는 흔들리기도 하는 서로 다른 입장의 개인들을 포착하면서, 아슬아슬하고 서늘한 밀도 높은 시대극을 완성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영화 <스파이의 아내> 속 해변가를 내달리다 태아처럼 웅크려 울고 있는 사토코. 사진=<스파이의 아내> 캡처

“이듬해, 유사쿠의 사망이 확인됐다. 그 사망 보고서에는 위조된 흔적이 있었다.
몇 년 후, 사토코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영화 말미,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검은 화면에는 두 줄의 자막이 띄워진다. 앞선 흑백의 무성 영화 속 예정된 결말과는 다른 전개다. 살짝은 뿌옇고 푸르스름한 색감의 화면을 가진 이 유성 영화 속 사토코는 끝내 죽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다음 삶을 살게 한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벗어나 그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언젠가 그가 외쳤던 것처럼, 시대가 당신을 바꾼 것이라면, 부디 당신도 그 시대를 바꿀 수 있기를.

시간과 공간을 건너, 어쩌면 우리에게도 염원처럼 남아 있는 그 소원을 빌어본다.

조예은 에디터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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