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단독] 아들 잃은 전직 장성, 네타냐후에 맞서다
참모총장 출신 가디 아이젠코트가 27일 총선에 10·7 진상 규명과 국민 통합을 내걸었다. 그는 트라우마에 갇힌 이스라엘의 출구를 말헀다.
[TIME단독] 아들 잃은 전직 장성, 네타냐후에 맞서다
참모총장 출신 가디 아이젠코트가 27일 총선에 10·7 진상 규명과 국민 통합을 내걸었다. 그는 트라우마에 갇힌 이스라엘의 출구를 말헀다.

문상덕 에디터
![[TIME단독] 아들 잃은 전직 장성, 네타냐후에 맞서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356%2F3ef4054d0d8444d1ba63b64fa2c58a81.png&w=3840&q=75)
가디 아이젠코트의 사무실은 단출했다. 훈장도, 외국 정상이나 유력 정치인과 찍은 사진도 없었다. 군 참모총장을 지낸 장성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장식이 보이지 않았다. 텔아비브 외곽의 상업용 건물에 자리 잡은 사무실은 과시와 거리가 멀었다.
책상 옆에는 사진 세 장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는 아들 갈의 사진이었다. 갈은 가자전쟁 발발 두 달 뒤인 2023년 12월 전사했다. 두 번째는 수년 전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전쟁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전, 가족이 온전히 함께하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세 번째 사진에는 갈이 같은 부대에서 복무한 절친한 친구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친구도 전투 중 숨졌다. 아이젠코트는 아들의 친구에 대해 “정착민이었다”고 했다.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 출신이란 뜻이다. 사진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중도 성향 군 지휘관의 아들과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출신 청년.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자란 두 사람은 함께 복무했고, 함께 목숨을 잃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폴로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아이젠코트는 인터뷰 도중 말을 멈추고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는 아들이 숨진 직후를 떠올렸다. 유대교 애도 의식인 ‘시바’를 사흘 밤 치른 뒤, 슬픔에 잠긴 가족을 두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전시내각 회의에 나갔다고 했다.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뿐 아니라 나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 한다. 전직 장성인 아이젠코트는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 네타냐후의 유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여론조사는 접전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네타냐후 집권을 끝낼 연합을 꾸리려 한다. 네타냐후가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안보 참사를 겪고, 가자전쟁을 시작하고, 나라를 깊어지는 국제적 고립으로 이끈 지 3년 만이다.
아이젠코트는 청렴하고 유능하며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쌓아왔다. 분열된 이스라엘 정치권의 여러 진영과도 관계를 맺어왔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은 아마도 아들을 잃은 비극일 것이다. 10·7 공격과 뒤이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스라엘에서 그의 슬픔은 수많은 국민에게 낯설지 않다. 이를 딛고 버티려는 그의 모습은 나라 전체의 몸부림과 겹친다.
10월 27일 총선은 네타냐후에 대한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3년간 이어진 유혈 사태와 책임 공방, 사회·문화적 분열 끝에 이스라엘 국민이 다른 길을 택할 준비가 됐는지를 가리는 선거다. 이스라엘의 양극화는 극심하다. 국제사회의 비판은 갈수록 거세지고, 반유대주의도 다시 번지고 있다. 유권자들은 누가 집권할지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가 될지를 결정하게 된다. 차기 지도자가 세계 유일의 유대 국가를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 중 하나로 몰아넣은 분열을 치유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이번 선거에 달렸다.
물론 네타냐후가 끝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각종 추문과 선거 패배, 부패 혐의 기소를 버텨낸 정치적 생존의 달인이다. 신뢰는 훼손됐지만 여전히 많은 이스라엘 국민은 그를 위험한 중동에서 자신들을 지킬 유일한 지도자로 여긴다.
아이젠코트는 나프탈리 베네트 전 총리와 야이르 라피드,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야이르 골란 등 다른 야권 인사들과 연합할 수 있다. 네타냐후는 이타마르 벤그비르와 베잘렐 스모트리치가 이끄는 극우 정당들에 기대야 한다. 이들의 초민족주의 노선은 젊은 우파 유권자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정당이 난립하는 이스라엘 의회제에서는 선거가 끝나도 승부가 명확히 갈리지 않을 수 있다. 연정 협상이 몇 주씩 이어질 수 있고, 끝내 결렬돼 재선거를 치를 수도 있다. 아이젠코트는 어떤 경우에도 네타냐후와 함께 거국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내세우는 목표는 시온주의 구상 자체를 지켜내는 것이다. 유대인이 조상의 땅에 세운 자신들의 국가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란의 위협에 맞서고, 이스라엘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고, 유대 민주국가라는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같은 땅에 대한 권리와 민족 자결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타협점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예루살렘 샬롬 하르트만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이 나라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이스라엘 국민 다수가 공유하는 유대적·민주적 가치”라며 “우리가 복원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고, 아이젠코트가 국민에게 제시하는 것도 결국 그것”이라고 했다.
아이젠코트의 과제는 네타냐후를 교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10·7 이후 이스라엘을 짓눌러온 트라우마에서 나라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과, 생존에 필수적인 민주적 가치·국민적 연대·국제적 정당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 끼어 있다. 그는 아들과 나라를 지키다 숨진 이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2023년 10월 7일, 오전 6시

2023년 10월 7일, 아이젠코트는 오전 6시를 조금 넘겨 눈을 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몸에 밴 생체리듬이었다. 텔레비전을 켜자, 집에서 차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닿는 곳에서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마스가 이끄는 무장대원 수천 명이 육로와 공중, 바다로 이스라엘 남부에 밀려들었다.
이들은 키부츠와 스데로트 시내를 휩쓸고 노바 음악축제장을 덮쳤다. 민간인을 살해하고 여성을 성폭행했으며, 시신을 훼손하고 수백 명을 인질로 가자지구에 끌고 갔다. 상당수는 잔혹 행위를 직접 촬영하며 학살에 환호했다.
절박한 주민들은 당국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호소했지만, 도움은 몇 시간 동안 오지 않았다. 보안 병력이 통제권을 되찾았을 때 공동체 전체가 초토화돼 있었다.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당시 25세였던 아들 갈은 텔아비브대 인근 자신의 아파트가 아니라 텔아비브 외곽 헤르츨리야의 본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텔아비브대에서 생물정보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유대교 명절 심하트 토라를 맞아 집에 와 있었다. 아이젠코트는 아들을 깨웠다.
“갈, 와서 텔레비전 좀 봐라. 스데로트 안에 하마스 트럭들이 들어와 있다. 이건 전쟁이다. 군 장비는 어디 있니.”
갈은 의무복무를 마친 예비군으로, 전투 의무병 훈련을 받았다. 아이젠코트는 아들을 부대 기지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기지 앞에는 모여든 예비군들의 차량이 이미 줄지어 있었다.
“이스라엘도, 세계도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곧바로 알았습니다.”
나흘 뒤 가자지구 지상전이 임박하자 네타냐후는 아이젠코트에게 전시내각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젠코트는 2015년 2월부터 2019년 1월까지 네타냐후 정부에서 군 참모총장을 지냈지만, 두 사람은 이제 정치적 적수였다.
네타냐후는 분열된 국민 앞에서 단합을 보여주려 했다. 국민 상당수는 이미 그를 불신하거나 혐오하고 있었다. 사법부 권한을 축소하려는 그의 시도에 맞서 수개월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진 뒤였다. 그는 다가올 전쟁을 앞두고 국민을 결집하려 했다.
전시내각에 들어간 아이젠코트가 가장 먼저 매달린 일 중 하나는 레바논의 친이란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와 제2전선이 열리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네타냐후 정부의 일부 고위 각료, 특히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은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반대에도 헤즈볼라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아이젠코트는 또 다른 대규모 전쟁에 뛰어들기 전에 남부에서 하마스를 격퇴하는 데 군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 문제에서는 그의 주장이 관철됐다.
그가 더 시급하다고 본 문제에서는 네타냐후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10월 7일 251명을 납치했다. 아이젠코트는 전면적인 군사작전보다 인질 석방을 우선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이 국가의 기본 의무이자 국가와 국민 사이의 약속이라는 생각이었다. 장기 지상전에 들어가면 인질을 살아서 데려올 가능성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제 생각은 먼저 인질 협상을 타결하고, 그다음 하마스를 격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네타냐후는 다른 길을 택했다. 이스라엘은 광대한 지하터널망을 비롯한 하마스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공습한 뒤 지상군을 투입했다. 하마스는 인구 밀집 지역에 군사시설과 무기를 배치해 민간인을 고의로 심각한 위험에 노출시켰다. 이후 이어진 군사작전으로 숨진 팔레스타인인은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로 7만 명을 넘었다. 보건부 집계는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분하지 않는다.
네타냐후의 “완전한 승리”

전쟁 발발 두 달 뒤, 아이젠코트 자신에게도 참사가 닥쳤다. 그는 군 지휘부에서 위성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자지구 최대 격전지 인근의 이스라엘군 대대 위치가 표시된 지도였다. 15분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던 소장이 다가왔다.
“가디, 잠깐 이리 오십시오. 갈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집으로 가십시오.”
아이젠코트는 40년 넘게 군에 몸담았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아들이 살아 있다면 집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라고 했을 것이다.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갈은 친구 에얄 베르코비츠와 함께 전사했다.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출신인 베르코비츠는 아이젠코트가 사무실에서 보여준 사진 속에서 갈 옆에 서 있던 청년이었다.
갈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참석했고, 장례식은 전국에 생중계됐다. 이스라엘 국민은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군 지휘관 중 한 사람이 아들을 떠나보내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이젠코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추도사를 읽었다.
“너와 다른 전사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희생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앞으로도 화목하고 행복한 가족으로 살아가겠다고 약속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 경례한다.”
사흘 뒤 그는 네타냐후의 전시내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네타냐후의 전쟁 수행으로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외톨이 국가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마스 표적을 겨냥한 공격에 휘말려 숨진 어린이들의 모습이 날마다 소셜미디어에 퍼졌다. 네타냐후는 가자지구 구호품 반입 허용에 저항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굶주림을 전쟁 무기로 쓰고, 가자지구에 갇힌 주민 200만 명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다고 비판했다.
아이젠코트는 2024년 6월 하순 네타냐후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총리가 크네세트(의회) 특별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였다. 아이젠코트는 전쟁을 어떻게 끝낼 생각인지 따져 물었다. “출구전략이 뭡니까.”
아이젠코트에 따르면 네타냐후는 아무 답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싸우겠다고 고집했다.
아이젠코트는 서류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마틴 인디크가 2021년 키신저의 국정 운영술을 분석한 《게임의 달인: 헨리 키신저와 중동 외교의 기술(Master of the Game)》이었다.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고위 외교직을 지낸 인디크는 아이젠코트의 친구이자 오랜 네타냐후 비판자였다.
“이 책 읽어봤습니까.”
네타냐후는 읽지 않았다고 했다. 아이젠코트는 외교 전략 없는 군사력으로는 지속 가능한 승리를 얻을 수 없다며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가 기억하는 네타냐후의 답은 이랬다.
“가디, 나는 전략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봅니다.”
아이젠코트는 네타냐후가 인질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데 분노했다. 네타냐후 비판자들은 그가 인질 협상으로 연정이 깨질 것을 두려워한다고 의심했다. 연정이 무너지면 조기 총선으로 실각할 수 있고, 10·7 안보 실패에 대한 조사도 시작될 수 있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뒤 설치돼 골다 메이어 총리의 퇴진으로 이어진 아그라나트 조사위원회와 같은 조사다. 아이젠코트가 보기에 네타냐후는 자신이 지켜야 할 국민의 생명보다 권력 유지를 앞세웠다.
“그는 그들을 방치했습니다.”
총리실 대변인은 여러 차례 입장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아이젠코트는 2024년 6월 9일 비상정부에서 사임했다. 정부 안에서 전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려던 8개월간의 시도도 끝났다. 베니 간츠와 함께한 그의 사임은 사실상 거국연정을 끝냈고, 전시내각 해체를 불렀다.
전쟁이 그의 가족에게서 앗아간 것은 아들만이 아니었다. 갈의 장례식 날에는 조카 한 명이 가자지구에서 전사했다. 그로부터 11개월 뒤 또 다른 조카가 목숨을 잃었다.
승리의 대가

이후 2년 동안 네타냐후 정부는 이례적인 군사작전을 잇달아 벌였다. 이스라엘은 10·7 학살 기획을 주도한 하마스 지도자 야히야 신와르와 오랜 정치국장 이스마일 하니예를 제거했다.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암살했고, 조직원들의 무선호출기 수천 대를 폭발물로 바꾼 대담한 작전 등으로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조직에 치명타를 입혔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복귀한 뒤에는 네타냐후가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2025년 6월 이스라엘의 ‘12일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켰다. 미군은 이란의 주요 핵시설 세 곳을 타격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는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었다. 2년간 이어진 가자전쟁은 팔레스타인 고립지대를 초토화했고,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스라엘 인질들은 기약 없는 포로 생활에 시달렸다. 2025년 10월, 거센 압박을 받은 네타냐후는 휴전과 인질 교환 합의에 동의했다. 전투가 멈췄고, 살아 있던 나머지 인질들이 풀려났다. 아이젠코트는 “네타냐후가 질질 끌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압박해서 하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몇 달 뒤 이란과의 대결은 더 위험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네타냐후는 트럼프가 이란과의 더 광범위한 전쟁에 뛰어들도록 설득하는 데 힘을 보탰다. 전쟁은 끝내기 어려워졌고, 미국 내 이스라엘 비판은 미국 우파 일각으로까지 번졌다. 2026년 3월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약 60%가 이스라엘에 비호감이라고 답했다.
이제 네타냐후는 10·7 이후 처음으로 유권자의 심판대에 선다. 아이젠코트는 네타냐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고 본다. 오히려 트라우마를 연장하고, 포위당했다는 심리와 끝없는 분쟁의 분위기를 조장해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전시 지도자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네타냐후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젠코트는 그 결말을 직접 써보기로 했다.
아이젠코트의 전략은 폭넓은 연합을 꾸리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베네트와 세속적 민족주의자 리베르만을, 왼쪽에는 골란과 라피드를 두는 구상이다. 골란은 유서 깊은 노동당을 계승한 민주당 대표이고, 라피드는 방송 진행자 출신으로 짧게 총리를 지냈다.
“그들에게 큰 정당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는 베네트와 공동 출마를 놓고 여러 차례 협의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각자 선거를 치르는 편이 야권 블록의 지지를 넓힐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대신 자신의 정당 ‘야샤르’를 이끌기로 했다. 베네트는 이후 라피드와 손잡았다. 아이젠코트는 군 경력과 진영을 넘나드는 인맥을 거론하며 말했다.
“이스라엘을, 이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을 능력이 제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해서가 아닙니다. 변화를 이루고 네타냐후를 이기겠다는 깊은 책임감 때문입니다.”
그의 출신 배경도 의미가 있다. 그는 모로코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티베리아스에서 태어나 남부 항구도시 에일라트에서 자랐다. 중동·북아프리카 출신 유대인을 일컫는 미즈라히 공동체 출신이다. 미즈라히는 아슈케나지(유럽계 유대인)가 주도해온 이스라엘 기득권층에게 오랫동안 차별받았다. 그가 당선되면 이스라엘 최초의 미즈라히 출신 총리가 된다.
아이젠코트는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 회복, 안보 강화, 유대 민주국가의 토대 수호를 내걸었다. 요르단강 서안의 불법 전초기지를 철거하고 팔레스타인인을 위협하는 극단주의 유대인 정착민을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군 복무나 민간 국가복무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고, 이란의 위협에 대응하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정치적 해법을 찾고, 악화한 대외 관계를 복원하고, 국민 통합을 되살리겠다고 했다.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다 보면 10·7이 남긴 심리적 상흔을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운전자들의 조급함, 격렬한 정치 논쟁, 악몽의 그림자 아래 사는 사회의 불안한 기운에서 드러난다. 나라는 과거의 참혹함과 현재의 불안을 분리하지 못한 채 그날의 여파 속에 멈춰 있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아직 2023년 10월 8일에 있다.
인터뷰 도중 아이젠코트와 기자는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 베셀 반데어콜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베스트셀러 《몸은 기억한다》는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 어떻게 사람을 심리적으로 과거에 가두는지를 다룬다. 반데어콜크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위험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 남아, 고통스러운 기억을 삶 속에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방해한다.
아이젠코트는 네타냐후가 의도적으로 그 회복 과정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다. 공격 이후 3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스라엘은 공격을 허용한 실패를 규명할 국가조사위원회를 아직 설치하지 않았다. 권위 있는 진상 규명 없이는 나라가 참사와 온전히 마주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취임 14일 안에 국가조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사 범위는 10월 7일 당일뿐 아니라 그에 앞선 10년간의 결정까지다. 자신이 군을 이끈 시기도 포함된다.
그는 공격에 어떤 형태로든 내부 배신이 있었다는 의혹이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군과 정보기관에 책임을 돌리려는 네타냐후의 행보를 꼽았다. 네타냐후와 그의 가족은 안보 당국자들이 10·7 공격 전 경고를 고의로 숨겼다는, 사실 여부가 논란인 주장을 퍼뜨려왔다. 하마스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당국자들이 총리를 깨우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안보 실패의 책임을 군과 정보기관에 떠넘기려는 네타냐후와 측근들의 광범위한 시도의 일부다.
과반 61석의 벽, 아랍계 정당과 손잡을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야샤르가 리쿠드를 앞서는 가운데 접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의 우파 연합도, 그를 교체하려는 정당들도 120석 크네세트의 과반인 61석을 확보할지는 불투명하다.
스모트리치의 종교시온주의당 소속으로 출마한 오하드 탈 의원은 “아이젠코트가 우리 연정에 합류한다면 대환영이기 때문에 거국내각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며 “상대편이 아랍계와 손잡고 과반을 차지한다면, 신이시여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했다.
대안 과반을 만들려면 아랍계 정당의 지지가 필요할 수 있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민감한 문제다. 아이젠코트는 이들을 정부에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연정 파트너에게 네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스라엘을 유대 민주국가로 인정할 것
▶독립선언문의 원칙을 따를 것
▶군 복무를 대신할 민간복무를 포함해 모든 시민의 국가복무 의무를 받아들일 것
▶하마스가 해체돼야 할 테러조직이라는 데 동의할 것
아랍계 정당 가운데 마지막 조건을 받아들인 곳은 아직 없다.
아이젠코트는 “이스라엘 제도에서는 큰 블록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안다”며 “엄청난 도전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네타냐후를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아이젠코트는 집권하면 네타냐후를 규정해온 정치 방식, 즉 이스라엘을 세계와 대립시키는 포위 심리 조장과 결별하겠다고 했다.
”그건 우리 사회에 독입니다.”
그 영향이 가장 큰 곳은 미국이다. 특히 젊은 미국인 사이에서 이스라엘 지지가 크게 약해졌다.
“네타냐후는 우리 누구보다 미국을 잘 알지만, 지금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를 개선할 수 없습니다. 지금 행정부와는 관계가 좋을지 몰라도, 대학가와 미국 유대인 사회, 초당적 관계는 바닥입니다.”
그의 제안 중 하나는 미국 군사원조 의존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원조 의존이 워싱턴에서 마찰의 원인이 됐고,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는 유대 국가라는 시온주의 이상과도 어긋난다고 본다.
“5년에서 1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이익입니다.”
아이젠코트는 국제사회 상당수가 오랫동안 지지해온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반대한다. 그러나 단일국가 체제의 심각한 위험도 인정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수백만 명에게 시민권과 투표권을 주면 유대인 다수 체제가 끝나고, 권리를 주지 않으면 민주국가라는 주장이 무너진다. 그는 스모트리치와 벤그비르가 내세우는 영구 지배 구상을 막으려 한다.
“스모트리치의 단일국가 구상은 우리나라의 종말이 될 겁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요르단강 서안에서 일정한 형태의 분리를 선호한다고 했다. 개혁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자치에 더 큰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은 군사적 통제권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가자지구 해법은 다르다. 그는 트럼프의 20개항 평화구상의 틀을 지지한다. 이 구상은 팔레스타인 기술관료 행정부가 가자지구를 통치하도록 하고, 조건부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길을 열어둔다.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20개항이냐, 무력이냐. 저는 외교적 선택을 선호하고,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안 되면 무력으로 하마스를 해체하는 방법도 압니다.”
트럼프와 협력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아이젠코트와 참모들은 트럼프가 네타냐후 지지를 선언하자 놀랐다. 트럼프는 TIME 인터뷰를 비롯해 앞서 여러 차례 네타냐후 지지를 밝힐 기회를 그냥 넘겼다. 사위 재러드 쿠슈너 등 가장 가까운 중동 참모 일부는 네타냐후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다. 논의 내용을 아는 이들에 따르면 폭스뉴스 진행자 마크 레빈과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대사가 선거 막판 트럼프에게 네타냐후를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아이젠코트는 “이스라엘 사회는 독립적이며 스스로 결정할 것”이라며 “트럼프가 이스라엘의 어떤 민주적 선택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네타냐후의 선거 조직은 아이젠코트를 공격하는 인공지능(AI) 생성 영상을 잇달아 퍼뜨렸다. 한 영상에서는 아이젠코트를 닮은 인물이 들판에서 젊은 이스라엘 병사에게 다가간다. 병사는 숨진 그의 아들과 꼭 닮았다. 그러나 이 인물은 병사를 안아주는 대신 옆으로 밀쳐내고, 아랍계 정당 라암의 대표 만수르 아바스를 끌어안는다.
아이젠코트는 이 영상에 대해 “경멸감을 느꼈다”며 “그가 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간 것”이라고 했다.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친리쿠드 성향 채널14 진행자 이논 마갈은 방송에서 아이젠코트를 “원숭이”라고 불렀다. 네타냐후는 며칠이 지나서야 “매우 부적절하다”고 했다.
아이젠코트는 이번 선거를 이스라엘이 시온주의 운동의 민주적·민족적 이상을 지킬지, 아니면 거기서 더 멀어질지를 가르는 시험대로 본다.
“제 목표는 이스라엘 국민이 하나가 되고 자기 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유대인이 유대 민족의 국가적 터전인 이스라엘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네타냐후가 권좌를 지키면 이스라엘인의 대규모 이탈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지난 7월 채널12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23%가 네타냐후가 재선되면 자신이나 친척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아이젠코트에게는 네타냐후의 화려한 언변도, 매끄러운 영어도, 수십 년간 국제무대에서 쌓은 경력도 없다. 그러나 그는 네타냐후가 국내외에서 갈수록 분열을 부르는 인물이 되면서 그런 강점의 쓸모도 줄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층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 오랜 지도자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는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가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이해관계와 힘, 더 큰 힘, 그리고 또 더 큰 힘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아이젠코트는 다시 트라우마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의 삶을 바꿔놓았고, 그가 보기에 나라의 운명까지 좌우하는 문제다.
“네타냐후는 우위에 있을 때 전쟁을 끝낼 용기를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를 아물게 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글 Eric Cortellessa 및 Ramat HaSharon, TIME 선임기자
한국어판 편집 문상덕 기자 mosadu@timekore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