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능성은 어디로 갔나, <비전퀘스트>가 놓친 것
복고풍 시트콤과 마녀 이야기의 변주로 새로운 형식과 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완다비전> 3부작. 마지막 작품 <비전퀘스트>는 복잡한 세계관과 화려한 액션에 기대면서도 정작 인물의 감정과 AI에 관한 질문은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
새로운 가능성은 어디로 갔나, <비전퀘스트>가 놓친 것
복고풍 시트콤과 마녀 이야기의 변주로 새로운 형식과 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완다비전> 3부작. 마지막 작품 <비전퀘스트>는 복잡한 세계관과 화려한 액션에 기대면서도 정작 인물의 감정과 AI에 관한 질문은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

조예은 에디터

디즈니+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만남은 처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였다. 2021년, 참신한 설정으로 시청자와 평단의 호평을 받은 <완다비전>이 그 시작을 알렸다.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와 그가 사랑하는 인조인간 비전(폴 베타니)은 복고풍 시트콤을 연상시키는 여러 세계를 오간다. 시청자들은 평범한 교외 생활이라는 외양 뒤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추리해야 했다.
하지만 결말은 여느 MCU 작품과 다르지 않았다. 화려한 디지털 효과로 치장한 뻔한 전투로 막을 내린 것이다. 올해 공개된 뒤 시즌 연장 소식까지 나왔다가 취소된 <원더맨>이나, 마녀를 소재로 한 2024년 작 <전부 애거사 짓이야>처럼 흥미로운 예외도 있었지만, 이후 마블 작품들은 갈수록 기대에 못 미쳤다. 디즈니가 마블 드라마 제작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싶다면 <완다비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비전퀘스트>의 첫 회만 봐도 충분하다. 해당 에피소드는 폴 베타니가 비전의 MCU 속 행적을 요약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악당 울트론이 비전을 만들어낸 순간부터, 어벤져스의 브루스 배너와 토니 스타크에게 인간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 타노스에게 파괴됐다가 완다의 슬픔이 빚어낸 환영 속에서 되살아나기까지의 이야기다. 비전의 10년 넘는 서사를 따라온 시청자에게나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다.
곧이어 올라 브래디가 연기하는 프라이데이, 에밀리 햄프셔가 연기하는 이디스, 제임스 다시가 연기하는 자비스 등 인간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들이 등장한다. 이들 역시 MCU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존재들이다.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비전은 자신의 '마인드스페이스'에 있는 영화관에 앉아 완다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이처럼 <비전퀘스트>는 이미 지나치게 복잡한 세계관으로 앞선 작품의 내용을 끊임없이 되짚지 않고서는 따라가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감정선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연출도 관습적이다. 3부작의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많은 설정과 기억을 따라갈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다.

완다가 슬픔 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가 무너지면서 두 번째로 파괴된 비전은 다시 만들어졌다. 그는 “몸은 같지만, 정신은 달라졌다”라고 말한다. 이제 비전은 예전처럼 완다와 그녀가 만들어낸 두 아들 토미, 빌리를 사랑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 비전은 스코틀랜드의 한 펍에 숨어 인간인 척하며 바텐더의 일을 돕는다. 이곳은 완다와 비전의 사랑 이야기를 아는 팬이라면 반가울 만한 장소다.
하지만 비전이 더 생생하게 살아가는 곳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신세계, 마인드스페이스다. 그는 보자르 양식과 20세기 중반의 모더니즘을 결합한 듯한 시골 저택에서 지낸다. 그곳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인공지능들이 모여 산다. 자비스와 프라이데이가 이 가상 공간을 이끄는 가운데, ‘오락용 인공지능’ 이디스는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리다 천창을 뚫고 떨어지는 등 엉뚱한 소동을 벌이며 웃음을 안긴다.
한편,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우던 비전이 이제 맥주를 따르는 신세가 되자, 주변 인물들도 어딘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하다. 덕분에 비전은 자신이 감정을 잃고 소중한 관계마저 잃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한때 가족을 사랑했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 돌아볼 시간을 얻는다. 어쩌면 비전의 무기력과 권태가 그를 위험한 선택으로 이끈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지어진 궁전의 외딴 탑에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을 가둬두고도 죽이지 않고 살려둔다.
현실 세계에서 위협이 닥치면서 비전의 고민도 달라진다. 심장을 갖고 싶어 하는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 나무꾼처럼, 비전은 자신에게도 심장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되짚는다. 그러던 중 그를 붙잡으라는 의뢰를 받은 무시무시한 현상금 사냥꾼 팔라딘(토드 스테쉬윅)이 나타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전은 토머스 셰퍼드(루아리드 몰리카)라는 젊은이의 존재도 알게 된다. 런던에 사는 그는 여러 문제를 안고, 팔라딘에게 쫓길 위험에 처해 있다. 이때, 토머스가 토미 막시모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빌리 막시모프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면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보길 권한다. 할로윈 시즌에 몰아보기에도 여전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문제는 비전과 토머스가 과연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의 비전은 이 소년을 진심으로 아낄 수 있을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건은 점점 커지고, 결국 초능력을 지닌 영웅이 인류를 구해야 하는 또 한 번의 대재앙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인류는 정말 구원받기를 원하는 걸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멸망을 바라는 건 아닐까?
울트론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면서도, 동시에 고난과 불행,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 말을 뒷받침하듯, 그의 탑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을 재현한 작품이 놓여 있다.

<스타트렉: 피카드>와 <12 몽키즈>를 만든 테리 마탈라스가 선보이는 <비전퀘스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오래된 주제부터 오늘날 화제의 중심에 선 인공지능까지, 여러 이야깃거리를 한데 모은다. 2022년 무렵부터 구상된 작품인 만큼, AI가 뉴스와 할리우드의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맞춰 이야기가 얼마나 달라졌을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전형적인 마블 작품답게 인물이나 주제를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화려한 액션과 잦은 배경 전환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현실 세계와 끝없이 펼쳐지는 마인드스페이스를 오가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상 배경은 개성이 부족해 비디오 게임의 스테이지처럼 보인다. 비전은 끊임없이 괴로운 자기 성찰에 빠져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했던 고민을 되풀이할 뿐이다.
AI를 둘러싼 고민도 새롭지 않을뿐더러 이야기 안에서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후반부의 여러 설정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차라리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중인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가 보고 싶어질 정도다. <플루리부스: 행복의 시대>는 인물 중심의 SF 드라마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처럼 기본적인 정보는 혼란스럽지 않게 주어지면서도,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는 자주 던진다.
그렇다고 <비전퀘스트>에 즐길 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작품은 베타니의 다채로운 연기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다만 그 매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미리 밝혀야 한다는 게 아쉽다. 비전이 울트론을 일종의 가족애 때문에 살려두었다는 설정에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지만, 베타니와 스페이더의 호흡은 훌륭하다. 지적인 악역을 능숙하게 연기하는 스페이더와 베타니가 함께하는 장면은 특히 좋다. AI도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에 좀처럼 빠져들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마인드스페이스의 AI들이 실제 인간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들보다 훨씬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마블이 작은 배역에도 그 역할에 꼭 어울리는 개성 있는 배우를 기용하는 솜씨는 이번에도 빛난다. 이번에는 영국 코미디 팬들에게 가상의 TV 진행자 필로미나 컹크로 잘 알려진 다이앤 모건이 팔라딘의 냉소적인 조수로 등장한다. 필로미나 컹크는 오만하면서도 무지한 인물로, 특유의 엉뚱한 매력으로 사랑받아 왔다. 화면에서도 근사한 아이디어가 몇 가지 돋보인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이너 윌 휴스존스는 외부의 간섭이 스며들 수 있는 공간으로 비전의 마인드스페이스를 구현했다.
하지만 형식적 실험이 돋보였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전퀘스트>는 시각적인 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완다비전>은 <오지와 해리엇의 모험>이나 <브래디 번치> 같은 옛 시트콤을 재치 있게 비틀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위저 보드부터 스티비 닉스를 떠올리게 하는 중독성 있는 창작곡까지, 마녀와 관련된 여성 캐릭터의 익숙한 클리셰를 마음껏 활용했다.
<비전퀘스트> 역시 <스몰 원더>가 생각나는 완다의 시트콤 세계를 간간이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비전을 내세워 이끄는 기술 중심의 액션 스릴러에 가깝다. 21세기 슈퍼히어로물에서 이미 숱하게 본 이야기다. 여기에 매회 되풀이하며 설명하고 언급해야 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방대한 과거 설정까지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더욱 단조로워진다.
디즈니+는 애초에 마블이 영화와 영화 사이에도 팬들이 사랑하는 인물들을 계속 등장시키며 세계관을 깊이 있게 발전시킬 기회였다. 하지만 그동안 나온 몇몇 작품들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비전’이다.
글 Judy Berman
한국어판 편집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이 기사의 원본보기: VisionQuest Puts a Frustratingly Conventional End to Marvel’s WandaVision Tri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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