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첫 번째 난민은 나의 부모였다” 국제구조위원회 데이비드 밀리밴드 총재
홀로코스트 난민의 아들인 데이비드 밀리밴드 국제구조위원회 총재는 난민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고객’이라고 불렀다.
“내가 만난 첫 번째 난민은 나의 부모였다” 국제구조위원회 데이비드 밀리밴드 총재
홀로코스트 난민의 아들인 데이비드 밀리밴드 국제구조위원회 총재는 난민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고객’이라고 불렀다.
이해진 에디터

40세에 환경부 장관, 41세에 외무부 장관, 44세에 당수 후보까지. 데이비드 밀리밴드(David Miliband)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anl Rescue Committee·IRC) 총재가 한때 써 내려갔던 이력이다. 영국 총리의 물망에 오르던 그는 2013년 돌연 국제 NGO의 수장이 되었다. 이 극적인 커리어의 전환 아래에는 운명적인 가족사가 흐르고 있다. 그가 다름 아닌 ‘난민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1940년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피해 영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는 16세의 나이로 벨기에를 탈출했고, 어머니는 10살 무렵 고국인 폴란드의 국경을 넘어야 했다. 2013년 밀리밴드는 주류 정치의 정점을 뒤로하고 국제구조위원회의 수장직을 맡으면서, “내게 이 일은 우리 가족사의 한 고리를 매듭짓는 일(a closing of a circle for me)”이라고 했다. 난민의 아들이 전 세계 난민들의 조력자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서울 역삼동의 국제구조위원회 사무실에서 데이비드 밀리밴드 총재와 만났다. 단정한 감청색 슈트와 와인빛 넥타이, 단단히 고정한 노란색 국제구조위원회 배지. 영락없는 엘리트 정치인 출신다운 차림새였다. 하지만 소년처럼 짧게 잘라 올린 머리칼과 격식 없이 건네온 미소는 묘하게 청년 같은 생동감을 주었다.
밀리밴드 총재는 이번이 첫 방한이다. 1933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설립된 국제구조위원회는 2022년 11월 한국 사무소를 두었다. 아시아 최초의 국제구조위원회 후원국 사무소다. 현재 국제구조위원회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40개 이상 국가에서 분쟁과 재난으로 삶이 산산조각 난 이들의 생존과 자립을 돕고 있다.
다만 국제구조위원회가 마주한 구조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2025년 전 세계 난민과 국내 실향민의 수는 역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2026년 현재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전쟁 등 정세가 불안하기만 하다.
Q 전 세계 강제 이주민 수가 1억 1780만 명(UNHCR, 2025년 말 기준)에 달한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왜 이런 위기가 찾아온 걸까요?
“지금 이 순간도 전 세계에서 60개의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려 예순 개입니다. 이는 국제 외교가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극을 촉발하는 동인은 수없이 많지만,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할 본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오늘날의 전쟁은 겉보기엔 내전의 형태를 띠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외부 세력의 대리전(proxy war)으로 기획돼 굴러가죠. 국제구조위원회가 발표한 '세계 위기국가 보고서(Emergency Watchlist)' 1위에 오른 수단이 대표적입니다. 외견상으론 수단 내부의 권력 투쟁 같지만, 들여다보면 외부 열강들이 돈과 무기를 대며 전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전쟁의 고통을 겪는 국가들이 동시에 극한의 '기후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후위기는 취약국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이를 불러싼 갈등은 기존 분쟁을 더욱 심화시키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라 식량 위기이자 지정학적 위기, 국제 공조의 위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글로벌 리더십을 바라보는 밀리밴드의 눈길은 서늘하기만 하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힘은 약화됐고, 트럼프 1기 행정부가 2018년 핵합의를 종료하면서 외교적 해법의 기반이 취약해졌다.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하며 국제 원조 예산도 삭감됐다. 실제로 미국의 원조 축소로 아프가니스탄과 남수단, 예멘 등에서 교육·보건 프로그램이 중단됐다. 밀리밴드는 이 같은 흐름을 ‘새로운 세계, 무너진 질서(New World Disorder)’라고 명명했다.

Q 지금의 무질서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를 복구할 방법이 있을까요?
“인도적 위기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판을 설계(Build)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초강대국이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던 과거의 모델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대신 유럽, 아시아, 중동에서 안정을 원하는 국가들이 ‘사안별(Issue-by-issue)’로 뭉쳐 새로운 공조 체계를 밑바닥부터 세워야 합니다. 어떤 국가는 인도주의에, 어떤 국가는 기후에, 또 어떤 국가는 무역에 더 민감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의제에 따라 유연하고 다층적으로 대응하는 공조 방식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모델에서는 시민과 민간 부문 또한 강력한 주체로 나서야 합니다. 과거 국제구조위원회는 미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국제 활동 지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개인과 기업, 재단의 자발적인 지원이 많습니다. 시민 사회와 민간의 강력한 관여가 인류를 구하는 핵심 동력입니다.”
Q 하지만 기업이 이미지 세탁(Whitewash)을 위해 NGO와 협력한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기업과 진정성 있는 파트너십을 맺는 국제구조위원회의 원칙이 있나요?
“우리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CSR, Responsibility)’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결과(CSR, Results)’를 요구합니다. 기업의 PR이 아니라, 우리의 ‘고객’에게 어떠한 실질적 결과를 주는가에 초점을 맞추죠. 기업이나 기부자가 ‘이 사람은 돕고 저 사람은 돕지 말라’거나 ‘특정 종교만 지원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운영의 결정권이 완전히 NGO에게 있어야 하며, 철저한 투명성이 담보돼야 합니다.”
Q 방금 수혜자를 ‘고객(Clien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호 단체에서 쓰기엔 꽤 이색적인 단어입니다.
“의도적인 네이밍입니다. 기존의 ‘수혜자(Beneficiary)’라는 단어는 인간을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타인의 선행에 기대어 혜택만 입는 객체로 보게 하죠.
하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보는 진실은 다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큰 주체는 결국 그들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중을 담아 '고객'이라 부릅니다. 고통에 처한 당사자들이 가장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걸, 구호 단체인 우리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구호 현장에 비즈니스의 언어를 빌려오는 파격. 이처럼 밀리밴드 총재는 NGO 세계의 혁신가로 통한다. 그는 기존의 ‘시혜성 원조’의 틀을 부수고, ‘혁신 기반 인도주의(Innovation-based Humanitarianism)’라는 새로운 트랙을 깔고 있다. 특히 과학적 사고의 도입, 데이터 기반의 위기 예측, 효용성 극대화를 강조한다.
Q 당신은 ‘인도주의 체계의 개혁가(reformer of the humanitarian system)’라고 불립니다. 전통적인 구호 활동과 무엇이 다른가요?
“우리는 스스로를 낡은 인도주의 체계를 뒤바꾸는 ‘개혁가’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구호 활동의 실질적인 영향력(Impact)을 엄격하게 평가합니다. 원조를 ‘제공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아요.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바꿨는지 집요하게 따집니다. 성과가 나쁘다면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또 작동하지 않는 오래된 시스템은 과감히 바꿉니다. 전통적인 구호는 ‘아프면 의료시설로 와서 치료 받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폭탄이 떨어지는 현장에서 의료시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전제가 틀린 거죠.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의료시설로 오게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동 의료팀을 운영해서 직접 현장에 찾아가자’고 말입니다. 우리는 분쟁 속 인간의 필요에 맞춰 시스템을 완전히 재조직합니다.”
Q 구호 활동에 ‘효율성’이나 ‘비용 효과성’을 따지는 것은 어딘가 냉정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혁신과 비용 효과성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2023년 동아프리카에서 백신 한 번 접종하는 데 3달러가 들었다면, 접종의 규모를 키우고 전문가를 훈련시킨 2025년에는 그 비용을 1달러로 줄였습니다. 한정된 재원의 가치를 극대화해 더 많은 사람을 돕는 비즈니스적 접근이죠.
국제구조위원회의 어린이 영양실조 치료 프로그램은 좋은 사례입니다. 동일한 예산으로 20% 더 많은 어린이를 치료할 수 있게 됐어요. '뮤악(MUAC) 테이프'라 불리는, 색상으로 구분된 암밴드라는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진단 도구를 개발한 덕분입니다. 부모나 지역사회 의료진이 아이의 팔뚝 둘레를 재기만 하면 됩니다. 병원에 가기 전, 즉 영양실조가 중증으로 진행되기 전 단계에서 조기 발견하니 치료 비용이 확 낮아집니다.”

Q 테크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군요.
“그래서 국제구조위원회에는 R&D 본부인 ‘에어벨(Airbel) 임팩트 랩’이 있습니다. 1940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가짜 여권을 만들어 난민들을 탈출시켰던 안전 가옥의 이름을 땄어요. 80여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 문화인류학자가 일하는 이 조직은 철저히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Q NGO가 R&D에 투자하고 실험을 거듭한다는 것이 낯섭니다. NGO에게도 실패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군요?
“실패할 의지가 없다면 혁신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빨리 실패(Fail fast)’하는 법을 배워야 하죠. 실험을 통해 빠르게 배우고 수정하는 문화를 갖는 것이 본질입니다.”
감성에의 호소보다 유능함으로 설득하는 NGO.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접근법이다. 시민단체를 향한 국민들의 낮은 신뢰는 그 부메랑과 같다. 2024~2025 사회통합실태조사(국무총리실 산하 한국행정연구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실시) 결과, 시민단체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53%로 대 금융기관(66%), 대기업(56%), 중앙정부(56%)보다 낮다.
Q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부 단체의 투명성을 우려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어떻습니까?
“국제구조위원회는 전체 예산의 87%를 실제 구호 프로그램에 직접 투입합니다. 마케팅과 행정을 포함한 간접비는 13%에 불과하죠.
특히 우리는 ‘고객’에게 중간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지털 방식을 포함한 현금을 직접 지급합니다. 난민들이 그 돈을 오직 자녀의 교육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쓴다는 명백한 데이터와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가계의 실질적 운영자인 여성에게 현금이 쥐어질 때, 공동체 전체가 다시 일어서는 사회적 회복의 시너지가 극대화됩니다. 시스템이 남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구호 단체의 새로운 길에 관해 오간 한 시간여 동안의 대화.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연 해결 가능한 과제인가.
늘어만 가는 분쟁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 반면 날로 약해져 가는 국제 협력의 가드레일. 이 거대하고 장기적인 무력감 앞에서 그 또한 지치지 않을까.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담담했다.
“제 동기부여는 언제나 ‘선을 행하는 것(doing good)’ 그 자체에서 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지우고 아주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작은 선이라도 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저 매일 눈앞의 선을 행할 뿐입니다.”

Q 당신이 과거 한 강연에서 ‘난민을 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저 먼 대륙의 분쟁과 난민은 뉴스 속 화면으로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얼마 전 레바논의 한 정부 보호소에서 어떤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폭격으로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렌터카 업체에서 일하던 남편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죠. 한국에도 렌트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그들 가족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집의 일곱 살짜리 아이는 하루 종일 두 손으로 귀를 꼭 막고 있었습니다. 미사일이 터지는 폭음이 너무 두려워서요. 전쟁 피해자는 평범한 우리 이웃과 그리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Q 그렇다면 세계가 거대한 무질서로 향하는 지금, 한국과 한국의 시민들이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길 기대하십니까?
“한국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는 나라입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에 발을 딛고 일어섰죠(Pull itself up by its own bootstraps). 물론 외부의 도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 놀라운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동등한 가치로 대하고, 종교와 인종의 다양성을 위험이 아닌 인류의 흥미로운 자산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권력의 부패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 한국은 이미 그 계몽주의적 이상을 역사 속에서, 가장 멋지게 증명해 낸 나라입니다.
난민의 고통을 마주하고 인도주의에 기여한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성장을 이끌어온 이 위대한 가치 체계를, 스스로 재강화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길입니다. 주는 것은 받는 것만큼이나 인류를 위대하게 만드니까요.
이제 한국은 문화, 스포츠, 비즈니스 모든 면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글로벌 플레이어입니다. 한국 특유의 역동성과 결기 그리고 상호 호혜성의 정신으로, 성숙한 리더십을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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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진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