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가족 이야기의 새로운 맛, <아버지의 집밥>
가부장제와 돌봄 노동,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엇갈린 마음. <아버지의 집밥>은 낯익은 가족 서사를 세로형 시네마에 담아, 그동안 당연시 해왔던 관계를 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해 가는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익숙한 가족 이야기의 새로운 맛, <아버지의 집밥>
가부장제와 돌봄 노동,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엇갈린 마음. <아버지의 집밥>은 낯익은 가족 서사를 세로형 시네마에 담아, 그동안 당연시 해왔던 관계를 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해 가는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조예은 에디터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한국인에게 ‘밥’은 중요하다. ‘밥 먹었냐’라는 말이 안부 인사로 쓰이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관계 짓기의 일부인 만큼. 오죽하면 ‘밥을 먹고 내는 힘’이라는 단어 ‘밥심’이 있겠는가. 새로운 사람을 알아갈 때도, 오랜만에 친했던 누군가를 만날 때도, 우리는 ‘밥’을 먹는다. ‘혼밥’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던 것도, 보통 ‘같이 먹는’ 밥을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먹는다는 것이 새롭고도 생경하게 느껴져서일지 모른다.
그런 민족에게 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집밥’일 것이다. 학업과 직업에 지쳐 아무리 노곤노곤한 상태로 집에 들어가더라도, 나를 기다리는 따뜻한 한 끼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소되는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인스턴트나 가공식품보다 정성스레 차린 한 상을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던 순간들. 이는 한국인에게 마치 ‘향수(鄕愁)’처럼 남아 있는 관성이자 잔상이다.
그런데 영화 <아버지의 집밥>은 이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엘리베이터걸이었던 순애와 구두닦이였던 하응의 첫 만남부터, ‘집밥’에 얽힌 순애의 한 맺힌 사연들, 험난했던 하응의 사회생활은 중간중간의 플래시백으로. 전라도 기독교 집안과 경상도 토박이 집안의 신경전 묘사나, 오랫동안 로맨틱 코미디에 쓰인 장면의 재활용, 가족의 반성을 끌어내는 클리셰의 사용은 재치 있는 순간으로. 과거와 현재를 촘촘히 오가며, 그렇게 공감과 웃음 속에 풀어낸다.
옛 가장(家長)들의 고충

40년간 '밥상머리의 폭군'으로 지낸 하응은 어느 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결혼한 이후로 매일 삼시세끼를 챙겨주었던 순애가 갑자기 ‘요리백지증’에 걸려버린 것이다. 평소처럼 장을 보고 돌아오다가 당한 가벼운 교통사고로 자신의 인생이 신호등의 빨간불에 걸린 것처럼 멈춰지자, 아내는 한술 더 뜬다. '감옥' 같던 부엌에서 나와 앞으로의 집밥을 남편에게 부탁하고, 그 결과물을 평가해서 벌점 10점을 채우면 이혼하자 선포해 버린 것.
순애는 홧김에 그런 말을 던진 것일까? 아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착실하게 집안일을 도맡아 왔다. 아무리 남편의 고지식한 요구여도 어떻게든 수용해 저녁밥을 지으려 했고,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식구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꾸준히 만들었다. 두 아이를 홀로 돌보며 날마다 해결해야 했던 크고 작은 과제들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겪어보는 막막함과 서러움을 그는 그저 묵묵히 견뎌냈다.
와중에 감당해야 했던 하응의 무심함과 언짢음, 자식들의 생떼와 불안은 또 어떤가. 남편이 애써 차린 밥상을 뒤엎고 강압적으로 식사 예절을 가르치면, 이에 두려워하는 명복과 재황을 달래면서 철없는 아들의 바람까지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 바로 순애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는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 무게는 그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짊어져야 할 당연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져만 간다. 원망이 쌓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제야 터질 게 터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응은 정말 무지막지한 사람일 뿐일까? 아니다. 그 역시 세상 풍파에 맞서 싸우며 가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유일하게 익힌 기술 하나로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쉽게 조아리고 아쉬운 소리를 한다. 변변찮은 가게 하나 없었지만 가족이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재산 모두를 써버린 것도 그런 책임감 때문이다. 평생 바빠서 남들 다 가는 여행도 한번 못 가봤다.
다만 그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모욕과 수치심을 집 안에서 푸는 듯, 아내와 자식들에게 군림하곤 했다. 바깥에서는 본인도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계급의 피해자면서, 안에서는 연신 명령하고 눈치 보게 하는 강자로 굴어 이 악습을 또 반복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속의 바깥양반과 안사람은 그렇게 소모되어 간다. 모두가 잘 살기 위함이었지만 한 사람은 긴 시간 동안의 마음고생과 몸고생에 기억력마저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일밖에 모르다 철 지난 장인이 되어 제 편 하나 두기 힘든 쓸쓸한 노년을 맞이했다.
이런 두 가장에게 ‘집밥’은 한풀이의 수단이자, 그간 알 수 없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매개체가 된다.
'집밥’이라는 마법

묽었던 된장찌개가 곰국, 짜장면, 미역국, 김밥, 굴전, 수육, 만두를 지나, 마침내 진국이 될 때까지. 한없이 서툴렀던 하응의 태도는 순애를 향한 미안함으로, 관심 어린 표현을 시도하는 사랑으로 변화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아내의 꾀병을 의심하고 거짓을 잡아낼 순간도 만나지만, 그런 ‘사실’들은 곧 의미가 없어진다. 순애를 위해 그동안 못 해주었던 ‘진심’ 가득한 대접이 유일한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신어온 순애의 구두를 이제서야 매만지고 고쳐보는 하응의 마음에는 응어리가 질 것이다. 언젠가 혼자 남을 자신을 위해 혹독한 집밥 과제를 준 아내에게 고맙다 못해 미안함을 느낄 것이고, 끝내 자신을 잊어버린 듯하지만 식사를 챙겨주어 고맙다는 말은 잊지 않는 그를 보며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그 깨달음에 다다를 때까지 영화는 서두르지 않는다. 한 번의 제대로 된 식사를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어 보는 시간만큼이나, 이 모든 과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 속에는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까지 모두 담겨있다.
신세대 부부의 고충

한편, <아버지의 집밥>에는 맞벌이 부부와 돌봄 노동에 대한 고민도 함께 녹아 있다. 자영은 직장인 여성으로서 부족하게 느껴지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부채감을 보인다. 때마다 저녁과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하고, 막상 하더라도 형편없는 실력에 레토르트 식품으로 돌아가고 마니, 미안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딸인 도혜가 아플 때 자책하는 모습을 통해 더 두드러진다.
이에 대해 명복은 매번 괜찮다고 한다. 어렸을 적 못 먹겠다는 오이를 억지로 먹이거나, 틈만 나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던 아버지와는 다르고 싶어서. 아내가 못하면 남편이 하면 되는 거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상사가 안주로 주는 오이를 받아먹어야 하는 날이면, 거나하게 취해서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타령을 한다. 사실 그에게 ‘집밥’은 여전히 아무 조건 없이 받을 수 있었던 따스함으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런 가족이라는 ‘이상’을 품어서 그런가. 그 안에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에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가. 이제 와서 가정적인 척하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재황이나, 당신은 왜 날 ‘못된’ 사람으로 만드냐는 자영의 핀잔에도, 명복은 그저 참고 격려하며 넘기려 한다. '사이 좋은 가족'으로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애의 간병 문제 앞에서 효율을 중시하고 돌봄의 가능 여부를 냉정히 가늠하려는 식구들에 의해 끝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한없이 진보적인 것 같다가도 한없이 보수적인. 세상 쿨한 것 같아도 부모 부양에 대한 책임감은 남아 있는.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지려 들다가도, 때로는 다른 이의 온기와 맹목적인 사랑에 무너지고 마는. 그것이 구세대와 신세대의 사이에 놓인 많은 부모이자 자식들인 이들의 풀기 힘든 난제일 것이다.
감독은 이런 체증을 조금이나마 내려보낼 수 있는 소화제로 야무진 손녀의 처방을 추가한다.
‘어른 아이’의 조언

도혜는 답답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아빠는 이재용이 아니고 엄마는 자기만 챙길 수 없는 상황인데. ‘직접 만들어 주는’ 집밥의 여부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두 사람이 싸우지 않고 같이 편안하게 밥을 먹는 것이 딸은 더 중요했다. 그것이 갑자기 생각난 냉동 치킨이든, 호텔에서 먹는 비싼 저녁이든, 뭐든 간에.
할머니를 어디에 모실지 걱정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다짜고짜 우리 집에 모시자고 한다. 엄마는 그럴 여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반문한다. 작은아빠는 우리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드리자고 한다. 정작 할머니에게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 어디에서 지내고 싶으신지, 또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지. 할머니의 삶이니까 할머니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초점이 흐려진 어른들의 대화를 뒤흔들며 또박또박 박히는 한 마디들은 상황을 다시 보게 한다. 물론 눈치껏 할아버지를 치켜올려 주다가도, 할머니의 품에서는 영락없이 아이가 되어버리기에, 그 명민함을 그냥 가볍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철이 너무 일찍 들어버린 도혜의 시선은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기특하다. 어쩌면 우리가 진작에 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대신 전한 것이 아닐까.
세로 화면으로 들여다본 가족

이 기나긴 이야기가 스크린의 한가운데 위치한 9:16 비율의 화면으로 펼쳐진다. 이준익 감독은 본 작품을 2분짜리 드라마로 찍은 뒤, 61개의 에피소드를 이어 붙여 146분짜리 영화 한 편으로 제작했고, 상영을 위한 별도의 크기 변환은 하지 않았다. 숏드라마가 극장 장편으로 재탄생한 국내의 첫 사례다.
덕분에 가로가 긴 화면을 볼 때보다 인물 개개인의 대사나 행동이 더 잘 보인다. 풀샷으로 잡아도 주변 배경으로 가는 시선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화면 중앙에 놓인 대상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바스트샷이나 클로즈업한 장면들 속 표정에 대한 몰입감도 올라간다. 나오는 인물마다 ‘주인공’이 되는 구조다.
이처럼 휴대폰 비율에 맞췄던 숏폼의 화면 크기는 영화관에 새롭게 제시하는 화면 크기로 전환되어, 이전과는 또 다른 감정이입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사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희생하는 어머니, 그런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는 아들과 그런 집안을 회의적으로 보는 또 다른 아들, 현대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며느리와 ‘촌철살인’을 날리는 어른스러운 손녀는 익숙한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적인 전개도 예측 가능한 범주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해 보는 성장물로서의 ‘가족 서사’는 ‘남 일’ 같지가 않다. ‘나’라면 어땠을까, 혹은 우리 가족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원작인 드라마가 가지고 있었을 짧은 호흡은 그렇게 영화관 내에서 숨죽여 지켜보게 되는, 어느 가족의 낯설지 않은 긴 역사가 된다.
이번 작품은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조명하기 위해.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다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팽배한 요즘 세상에 삼삼함을 한 스푼 더하기 위해, 부러 이런 시선을 택한 것이 아닐까.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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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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