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애니메이션, IP의 다음 장을 열다
소설과 웹툰에서 출발한 IP가 애니메이션을 만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장과 해외 시장, 다른 콘텐츠로 이어지는 K-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로를 살펴본다.
K-애니메이션, IP의 다음 장을 열다
소설과 웹툰에서 출발한 IP가 애니메이션을 만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장과 해외 시장, 다른 콘텐츠로 이어지는 K-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로를 살펴본다.
조예은 에디터

한국 애니메이션의 존재감이 달라지고 있다.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뽀롱뽀롱 뽀로로>부터 <캐치! 티니핑>까지, 캐릭터와 세계관을 중심으로 성장한 애니메이션 IP는 꾸준히 새로운 관객을 만나왔다. 2024년 극장 개봉한 <사랑의 하츄핑>은 120만 명 이상, 2026년에 공개한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은 8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흥행 가능성을 보여줬다.
여기에 지난해 공개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또 다른 저력을 드러냈다. K팝과 한국 문화를 결합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IP로 출발한 이 작품은 넷플릭스에서 6억 회 이상의 누적 시청 수를 기록하며 역대 가장 많이 시청된 넷플릭스 작품으로 자리 잡았고, 속편 제작까지 공식화됐다. 작품의 인기는 화면 밖으로도 이어져 팬들의 커버와 코스프레, 댄스 콘텐츠가 쏟아졌고, 싱어롱 상영과 굿즈 및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가 등장했다.
애니메이션의 달라진 존재감은 영화제에서도 감지된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애니메이션 특별전을 신설해 장·단편 13편을 소개하는 한편, 특별전 외에도 14편의 애니메이션을 여러 섹션에서 상영한다. 정한석 집행위원장은 올해 영화제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애니메이션의 약진’을 꼽으며, 전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이 강력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눈여겨볼 변화는 새로운 IP의 탄생에만 있지 않다. 이미 존재하는 소설과 웹툰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불러오는 작품들도 등장하고 있다. <퇴마록>, <연의 편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아가미>가 그 사례다.
기존 IP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흐름이 나타난 배경에는 여러 산업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양혜림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원장은 2020년 이후 웹툰을 원작으로 활용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늘어난 배경으로 웹툰 산업의 성장과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의 발전, 글로벌 배급망의 확대를 꼽았다. 특히 디지털 제작공정이 보편화되면서 제작비와 제작 여건의 제약으로 시도가 어려웠던 판타지, 액션, 오컬트 등의 서사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원천 IP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극장과 해외 시장으로 나아가는 한편, 출판과 공연 등 다른 콘텐츠로도 이동하고 있다.
IP의 이동으로 ‘극장’과 ‘국내’를 넘어서다

1990년대에 등장해 누적 판매량 1,000만 부를 돌파하고, 온라인 연재 조회 수 2억 3,800만 뷰를 기록한 이우혁 작가의 소설 『퇴마록』은 한국 장르 소설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네 명의 퇴마사가 절대 악에 맞서는 이 오컬트 판타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고, 영화는 누적 관객 수 50만 명을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이는 2025년 한국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이러한 흥행은 오래된 원작 IP를 다시 움직이는 계기가 됐다. 로커스 황지유 PD는 애니메이션을 계기로 절판됐던 원작 소설이 재출간돼 5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30대가 주축이 된 굿즈 펀딩 역시 6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기록했다.
이후 원작과 영화에 대한 관심은 롯데월드타워 재개봉 및 미니 전시, 현대백화점 신촌점 팝업, 더현대서울 체험전 등 오프라인 콘텐츠로도 이어졌다. 소설에서 출발한 IP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다시 소비되고, 원작의 재출간과 굿즈, 전시 등으로 소비 접점을 넓혀간 것이다.

조현아 작가의 웹툰 ‘연의 편지’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 온 ‘소리’가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의문의 편지를 따라 펼쳐지는 성장물이다. 2010년 후반 연재 당시 9.98의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단행본 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작품은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나아갔다. 제26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최초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데 이어 3관왕을 기록했으며, 오타와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OIAF) 등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됐다. 해외 166개국에 선판매됐으며, <너의 이름은>과 <스즈메의 문단속> 등을 제작한 CoMix Wave Films가 일본 배급을 맡아 9월 25일 현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크린 밖으로도 IP의 이동은 이어졌다. 공식 애니메이션 아카이브북이 발간됐으며, 창작 뮤지컬 <연의 편지>는 9월 16일부터 11월 29일까지 공연된다. 웹툰에서 출발한 IP가 애니메이션을 거쳐 해외 시장으로 나가고, 출판과 공연 등 다른 콘텐츠로 이어진 사례다.
문학 IP로 ‘장르’와 ‘서사’의 폭을 넓히다

2019년에 공개된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4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다. 여기에 수록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열여덟 살이 되면 지구를 뜻하는 ‘시초지’로 1년간 순례를 떠나는 사회에서, 일부 순례자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쫓는다.
이를 다룬 애니메이션은 본래 기획된 러닝타임을 2배로 늘려 등장인물의 서사를 더욱 세밀하게 담아냈다. 원작이 데이지가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영화는 편지의 수신인이던 소피를 직접 등장시키고 두 사람의 ‘통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먼저 떠난 데이지가 소피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닫는 결말 역시 두 사람의 재회까지 그려보는 방향으로 해석을 더 했다.
해당 작품은 제27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한국애니메이션산업협회장상(기술상)을 수상하고, 제50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는 호러·SF·판타지·스릴러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소개하는 ‘Animated Thrills and Chills’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기존 가족 중심의 극장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성인 관객을 위한 SF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아가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깊은 물 속에 던져진 날, 아가미가 생긴 소년 ‘곤’과 그를 둘러싼 존재들의 상처와 이야기를 그린 판타지 소설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는 그동안 국내 문학 작품을 다수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온 안재훈 감독과 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가 참여했다.
양 원장은 애니메이션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원작과 같은가”보다 “무엇이 원작과 달라졌는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시간과 움직임, 소리, 공간감 등 애니메이션만의 표현 요소를 통해 원작에 새로운 가치와 경험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가미>는 곤의 비늘과 인물들의 심리를 환상적인 작화로 시각화하고, 국내 배경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모티프로 한 유럽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작품의 공간을 새롭게 묘사했다. 여기에 구병모 작가의 문체가 담긴 대사를 내레이션 등으로 배치해 본래의 분위기를 살렸다. 원작의 판타지적 세계와 문학적 정서를 애니메이션의 언어인 이미지와 소리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각색을 거친 애니메이션 <아가미>는 개봉 전인 2024년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 경쟁 부문인 콩트르샹에 초청된 데 이어 런던 프라이트페스트 등 해외 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 대만 등 해외 주요 지역에 선판매되기도 했다. 문학 IP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새로운 표현과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IP와 관객 사이의 경유지
이처럼 K-애니메이션은 이미 만들어진 소설과 웹툰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하는 한편,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다루지 않았던 장르와 서사를 시도하며 새로운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어 간다.
안숭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하나의 원천 IP가 여러 매체로 이동하는 현상 자체는 새롭지 않지만, 최근에는 각 매체가 서로 다른 이야기와 경험을 더하는 방식으로 IP가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애니메이션화는 완성된 원작을 다른 그릇에 옮기는 작업이라기보다, 이미 팬들과 관계를 맺어온 스토리가 새로운 표현 체계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는 이러한 흐름이 기존 원천 IP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애니메이션을 본 뒤 원작을 역으로 찾아가는 것처럼, 하나의 콘텐츠에서 시작된 관심이 다시 원천 IP로 이어지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 교수는 애니메이션과 웹툰·출판·영화·드라마 등 콘텐츠 장르 간 경계를 넘어서는 제작 환경은 "제로섬처럼 이전 시장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닌, 계속해서 시장이 커지는 상태"라며 그 시너지를 언급하기도 했다.
즉, 오늘날의 K-애니메이션은 다양한 IP를 끌어오며 애니메이션의 저변을 넓히는 한편, 하나의 IP가 다른 콘텐츠로 이어지는 경유지의 역할을 맡고 있다.
조예은 에디터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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