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기식, 너무 빠른 시대에 느린 걸음을 걷다

사진을 잘 찍고 싶다는 마음으로 매일의 장면을 모으고, 오랜 시간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가는 표기식 작가. 상업 사진과 개인 작업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식을 들어봤다.

작성 :
표기식, 너무 빠른 시대에 느린 걸음을 걷다
<표기식 사진전: 빛은 어떻게 떨어졌길래 모두 다르게 반짝여서> 중 한강의 모습.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양털 구름이 하늘을 빼곡히 메우고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던 어느 완연한 가을날. 장충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표기식 작가를 만났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공간에는 사진작가로서의 손때가 묻었을 기물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는데, 한쪽 창문으로부터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이 이 공간을 차분하게 감싸주었다. 한적했던 오후 4시,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대화들은 이곳과 퍽 어우러지게 흘러갔다.

표기식 작가는 디자인 전공 후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사진작가가 됐다. 그 계기를 묻자, 그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예요. 모션 그래픽을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라고 덤덤히 답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작업실을 마련하고 투자받아 법인 회사를 만들면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이 들어오면 이틀, 사흘 밤을 새우기도 할 만큼 최선을 다했던 그는 언제부턴가,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과 밤샘 작업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차츰 취미로 찍던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도화선처럼 확 터진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르바이트처럼 배우 소지섭의 시즌 그리팅을 촬영하기도 하고, <보그걸>의 피처 기사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려고 카페를 돌아다니기도 하면서, 그는 “사진을 본격적인 직업으로 삼아 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만난 자신의 첫 데뷔작, 샤이니의 정규 3집 <Dream Girl-The Misconceptions Of You> 앨범 재킷 촬영. 당시의 나이는 서른 중반이었고, 더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2013년에 진행한 네이버 <타임북 14>에 1년 동안 찍었던 나무 사진을 싣고, 추가 촬영으로 수입을 벌었다.

사진을 직업으로 삼을 명분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그때, 친구와 스튜디오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남동 유엔빌리지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바로 그 친구다. 일해서 스탠드 하나 사고, 다시 일해서 조명 하나 사는 식으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이처럼 “여러 타이밍이 맞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그의 고백에는 그간 사진작가 되기 위한 묵묵한 노력이 녹아있다.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서 진행 중인 <표기식 사진전: 빛은 어떻게 떨어졌길래 모두 다르게 반짝여서> 작가, 표기식의 모습. 사진=표기식 작가

이후, 페퍼톤스의 정규 6집 앨범 <LONG WAY>와 이찬혁의 첫 솔로 앨범 <ERROR>의 아트워크들. 다양한 잡지 속 화보와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파타고니아 및 애플 등과 함께한 브랜드 프로젝트들. 영화 <족구왕>, <땐뽀걸즈>, <절해고도> 등과 드라마 <사랑의 이해>, 최근 종영한 예능 <더 커뮤니티2: 보이지 않는 손>의 포스터들.

대중문화 전반에서 표기식은 계속해서 고유한 세계를 펼쳐왔다. 그런 그가 지난 9월 23일부터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서 <표기식 사진전: 빛은 어떻게 떨어졌길래 모두 다르게 반짝여서>로 자신의 또 다른 세계인 개인 작품들을 선보이는 중이다.

“어떻게 보면 연습장 같은” 작업부터, “그냥 지나칠 만한 장면”을 발견한 사진까지. 사진을 잘 찍기 위해 계속 공부 중이라는 성실함과 계획과 달라도 마음에 드는 풍경을 찾아 찍는다는 노련함은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미덕이다. 비록 “산만해서 하나를 오래 집중해서 보는 게 잘 맞지 않는다”고 고백하지만, 즉각적으로 포착 가능한 장면을 찾고 있는 그는 “주파수가 온통 그런 쪽”에 맞춰져 있을 정도로 기민하다.

그렇게 무심히 내뱉는 말들 사이에서 건져올린 표기식 작가만의 여유와 고민, 사진과 대상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던 순간들. 그 결을 따라 오랜 시간 같은 나무를 바라봤던 시간부터 되짚어 봤다.

난지한강공원에서 찍은 나무 한 그루.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전시의 포문을 여는 ‘나무가 서 있다 여전히 그 자리에’의 사진들은 한강에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를 장기적으로 찍은 기록 작업이죠. 처음 시선이 머문 순간부터 180장의 사진으로 이어지기까지, 나무는 어떻게 다른 존재가 돼 갔나요?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난지한강공원 샛길의 벤치에 앉았어요. 카메라를 세로로 돌려 프레임을 잡으니, 주변의 어린나무들은 보이지 않고 나무 한 그루만 담겼죠. 그 순간, 그곳이 갑자기 다른 공간처럼 보이는 게 매력적이어서 찍기 시작했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도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잎이 나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강변 쪽으로 더 열려 있고 길에서도 떨어져 있어 온도가 낮았던 거죠. 그때는 몰랐지만, 촬영을 이어가면서 나무마다 잎이 나고 지는 시기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은 13년이 지났잖아요. 한강에 가 보면 그 나무는 원래 형태를 유지한 채 크게 자랐고, 주변에도 나무가 많아져 아주 좁은 틈으로만 보여요. 오래 봐 온 저는 그 나무의 수염만 봐도 알아볼 수 있지만요.

Q 그 사진들은 계절과 풍경이 달라지는데도 일관된 감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 같은 대상을 촬영할 때 지키려는 기준이 있었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느끼는 감각은 똑같았어요. 바람에 나무가 확 쏠리는 모습이 사람의 표정 같다고 느꼈고, 그 형태에서 오는 다양한 인상을 보기 원했죠. 그래서 사용하는 렌즈를 70mm로 고정했고, 나무를 중심으로 한 사진이 충분히 쌓이면 조금 더 당기거나 와이드하게 찍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여주려고 했어요.

계절이 바뀌면서 풍경도 달라졌죠. 여름에는 나무와 식물이 가득해 뒤쪽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겨울에는 억새가 낮아져 가양대교와 도시까지 드러나요. 그 차이를 줄이려고 카메라 각도를 낮춰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앞서 찍은 사진들이 부정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원래 찍던 대로 있는 모습을 모두 담기로 했고, 다시 잎이 나는 봄을 거쳐 여름까지 촬영해 정확히 1년을 채웠어요.

교토 아라시야마의 산 속 구멍.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아침의 위로’ 공간에서는 대자연이 홀연히 드러낸 모습에 빨려가는 듯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울창한 숲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틈을 내는 ‘구멍’들을 두고 ‘모호함, 불분명함, 약간의 쓸쓸함’이라 표현했지만, 오롯함과 꼿꼿함, 신비로움도 느껴졌는데요. 매력적인 균열들에 시선이 향한 이유가 뭘까요?

처음 시작한 건, 2016년 교토에서 아라시야마의 뚫린 부분을 찍으면서였어요. 그 사진을 찍고 돌아온 뒤 산과 나무를 많이 찾아보게 됐어요. 그런데 결국 그 구멍은 무언가가 있던 자리거든요. 큰 구멍은 나무 한 그루 정도가 부러지거나 쓰러진 자리이고, 작은 구멍은 가지가 떨어진 자리일 수도 있어요.

지금은 그 구멍이 거의 다 메워졌어요. 10년 가까이 지났으니까요. 숲이 대체로 그렇더라고요. 나무가 씨앗을 퍼뜨리고, 새 나무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기존의 나무가 죽거나 쓰러져야, 다른 나무가 성장할 기회를 얻기도 하잖아요. 그 숲도 새로운 나무가 생겼거나, 옆에 있던 가지가 자라면서 빈자리가 메워진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이 우리가 사는 사회와도 조금 비슷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 시리즈의 제목이 ‘홀 오브 프레임(Hole of Frame)’이거든요. ‘홀 오브 페임(Hall of Fame)’이라는 표현에서 ‘홀’을 ‘구멍’으로 바꾼 거예요. 명예의 전당이 아닌 그 자리를 ‘프레임’이라고 부른 건, 누군가 있었던 자리를 기록한다는 의미고요.

물론 그 장면이 시각적으로 인상적이고, 하나의 주제로 묶기 좋은 사진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어요. 자연물의 초상 사진 같은 개념 아닐까요? 사람들도 증명사진을 찍고, 자기 사진을 찍고, 인생 사진을 남기잖아요. 그런데 자연물은 아무도 찍어 주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런 대상에 관심이 많아요.

노을 지는 한강의 모습. 빛이 반짝거린다.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가장 찬란한 빛’과 ‘노을은 매일 녹아내린다’에서는 한강의 윤슬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013년부터 12년 동안 한강을 촬영해 왔는데, 보통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나요?

이 작업은 강변북로에서 차가 막힐 때 한강을 바라보다가 시작했거든요. 한눈팔면서 한강을 보고 있자니 반짝이는 빛이 보이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나가서 찍어 보니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나중에 내린 결론은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가 가장 예쁘다는 거였어요. 눈앞에 좋은 장면이 보여서 아무리 빨리 셔터를 눌러도 이미 늦어요. 그 순간은 사라져 버리니까요.

처음에는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게 있었어요. 어느 지점에 가서 어떤 시간대에 찍던 마음에 드는 사진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작업량이 늘수록 미묘하게 다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도 생기더라고요.

그러면서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됐어요. 겨울에는 제 키에서 촬영하기에 해의 높이가 적당하더라고요. 그래서 시간대를 달리해 가며 자주 나가는 것도 계산하게 됐죠. 겨울에는 여름보다 물도 조금 더 깨끗해요. 비가 덜 오니까요. 그런 것들을 하나씩 생각하게 됐어요.

Q 오랫동안 촬영해 온 지금도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 있나요? 특히 어떤 시기의 윤슬을 사랑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윤슬의 사전적 정의는 잔잔한 물결에 비치는 햇빛이나 달빛이잖아요. 그런데 전시장에 있는 사진들이 그 정의에 딱 들어맞느냐고 하면 조금 달라요. 잔잔한 물결은 별로 없거든요. 한두 컷 정도예요. 5~6월에 기분 좋은 바람이 불 때가 있잖아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수면이 파르르 떨리면서 윤슬이 나타났다가 사라져요. 전시장에도 그런 사진이 한 컷 있어요. 굳이 따지면 윤슬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컷인 것 같아요.

재미로 치면 겨울이 가장 흥미로워요. 강이 꽁꽁 얼면서 물성이 달라지잖아요. 얼음이 깨지면 갈라진 틈으로 빛이 들어가기도 하고요. 그런 변화가 재미있어요. 봄, 여름, 가을에는 물의 물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겨울에는 얼음으로 변하니까요. 얼어붙은 강 위에 눈이 쌓이기도 하고요.

한강을 촬영한 흑백 사진 가운데,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것도 얼음이 갈라진 모습이에요. 얼음이 갈라지기 전에 눈이 와서 위에 조금 쌓여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조건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보통 강이 얼면 한강순찰대가 모터보트를 몰고 나와서 원을 그리며 돌아요. 그러면 파도가 계속 생기고, 그 파도가 얼음 쪽으로 가면서 얼음이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깨져요. 강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도록 하는 거죠.

처음에는 ‘얼어 있는 강도 새롭고 좋은데 왜 깨는 걸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관리 측면에서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더라고요. 작은 배들이 얼음을 뚫고 지나가기 어려우니까, 완전히 얼어붙기 전에 미리 깨 놓는 거예요. 그러면 얼음이 약해지니까요. 그런 것도 촬영을 계속하면서 알게 됐어요. 결국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을까요? 어떤 장르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을까요? 어떤 장르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나무의 결과 같은 한강의 물결.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플라타너스의 껍질이 벗겨진 몸통, 한강이 만들어내는 결, 사진에 남은 오류의 흔적까지. 그동안 자연을 촬영하며 하나의 ‘무늬’들을 포착한 듯합니다. 이런 순간들의 느슨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에요. 자연물을 계속 찍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모으다 보니 비슷한 결이 있더라고요. 하늘에서도 강물의 물결을 찾고, 플라타너스 껍질에서도 강물의 결을 보기도 해요. 반대로 한강을 찍으면 다리 그림자가 비쳐서 동글동글하게 맺힐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플라타너스 몸통 같기도 하고요.

Q 메모리 카드 리더기의 ‘오류’로 생긴 흔적도 이미지의 일부로 받아들였는데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작업을 방해하는 요소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나요?

아니, 너무 예쁘잖아요.(웃음) 그 오류가 남은 사진도 그렇지만, 전시 마지막 공간에 필름을 태운 사진들이 있어요. 그게 아날로그 방식의 오류라면, 이쪽은 디지털 방식의 오류예요. 저는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필름을 태운 사진은 의도적으로 빛을 넣은 거지만, 어느 컷이 얼마나 탈지는 제가 계산할 수 없어요. 어떤 장면에서 이 정도는 타겠다고 대략 예상할 수는 있죠. 그 정도는 손에 익었으니까요.

디지털 오류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사진 열 장을 리더기에 넣으면 네다섯 장에서 오류가 나요. 그 나름의 규칙이 있어요. 스무 장을 넣으면 열 장 정도 오류가 나올 때도 있고, 적거나 많을 때도 있지만 어쨌든 오류가 생기죠. 그리고 절반 정도만 오류가 생기더라도 패턴은 다 달라요. 똑같은 오류가 반복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재미있어요. 계산하지 않은 조합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게 좋더라고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우연을 많이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산해서 원하는 사진을 찍는 것도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아요. 우연히 얻은 사진을 두고 ‘내가 다 계산했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찍혔고, 그 느낌이 좋아서 남긴 거죠.

한가롭게 누워있는 고양이의 모습.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담으려 하는 것 같아요. 개입과 연출을 최소화한 작업이라 볼 수도 있겠죠. 사진작가로서 원하는 이미지를 촬영하려는 마음과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지도 궁금한데요.

가령 한강의 버드나무를 1년 동안 찍으면서 그 과정을 다 지켜봤잖아요. 물론 한 번뿐인 순간도 있지만, 기회는 또 있다고 생각해요. 1년이 365일이니까 최소 300번은 기회가 있는 거잖아요. 반면에 벤추라에 출장 갔을 때처럼 일생에 몇 번 없는 기회라면 다르게 행동하겠죠. 그때는 아침 일찍 나가서 계속 찍었어요. 파도와 서핑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속 컷으로 쓸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제가 이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느냐는 거거든요. 그렇게 무리하면 오래 할 수 있을지 생각했을 때, 아닐 것 같아요. 적당히 관찰하는 정도라면 나이가 들어 다리나 허리가 아파져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오래 보고 오래 찍고 싶어요.

Q 한편, 이렇게 자연을 오랫동안 기록하는 개인 작업을 지속하는 동시에, 앨범 아트워크와 브랜드 사진 등 상업 작업도 이어 가고 있죠. 스스로 찍고 싶은 것을 찍는 일과 의뢰받은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분리하려고 하죠. 자아실현은 제 개인 프로젝트에서 하면 되거든요. 굳이 상업 사진에서 제 작업 세계관을 펼쳐 보이려고 욕심을 부리는 건 좀 과한 것 같아요. 상업 촬영은 모두가 일찍 퇴근하는 걸 목표로, 주어진 일에 맞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찍고 싶은 게 있으면 개인 작업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 같아요.

Q 그동안 참여한 작업 가운데 스스로에게 특히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작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스튜디오에서 처음 촬영한 영화 포스터가 <족구왕>이었어요. ‘96개의 필름, 96개의 반짝임’ 공간에서, 바닥에 무언가 끌린 자국만 남은 사진이 한 컷 있거든요. 주인공 재홍이가 계속 발차기를 하면서 생긴 발자국이죠. 아무래도 첫 작업이라 기억에 남아요. 상상마당으로부터 의뢰받은 그 작업의 영화감독이 우연히 제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요.

한편, 그 공간은 작가인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 채워 달라고 부탁받은 곳이에요. 첫 스튜디오가 유엔빌리지에 있었을 때 밥을 챙겨 주던 고양이 사진도 있어요.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찍기 전부터 고양이들과 인연이 있었던 거죠.

또 <눈물나> 사진이나 여성 모델의 포스터가 일부만 남아 있는 사진 같은 경우에는 제가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니까 찍을 수 있었던 장면들이에요. 그런 사진도 넣었어요. 나름대로 이유가 조금씩 있긴 하지만,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이유는 아니고 작은 이유들이죠.

붉게 물든 한강의 모습. 세로로 이어진 물결과 곳곳의 빛이 인상적이다.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사진과 이미지가 빠르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시대에, 한 장소를 10년 넘게 찾아가고 같은 대상을 반복해서 바라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보통 상업 사진은 만난 지 5분 만에 찍기도 하지만, 천천히 보고 관찰하는 일이 제 성향과 잘 맞고,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해요. 사실, 13년 전에 AI가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저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했는데, 지금은 역설적으로 너무 빠른 시대에 느린 걸음을 걷는 제가 조금 대비되는 존재가 된 것 같아요.

“너무 빠른 시대에 느린 걸음을 걷는 제가 조금 대비되는 존재가 된 것 같아요.”

Q 그렇게 자신만의 작업을 계속 이어가는 동안 생긴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요?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내년에도 사진을 계속 찍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예전에 상업 사진 일을 시작했을 때도 일단 1년을 버티는 데 집중했지, 먼 미래까지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깨가 아플 때도 있고,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기도 하고, 무리하면 허리가 안 좋아지기도 해요. 서울에서 계속 월세를 내면서 생활하는 게 과연 맞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고요. 그런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저는 낙관적인 피터 팬 같은 사람은 아니거든요.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조금 냉소적인 편이죠. 그래도 무슨 일이 생겨도 그냥 잘 정리해서 해나가면 되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요.

흑백으로 표현한 윤슬의 모습. 은하수를 닮았다. 사진=그라운드시소, 표기식 작가.

Q 유난히 사진 속 자연이 우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찾는 관객들이 만끽했으면 하는 경험이 있나요?

사진을 오래 바라보는 분들을 보면 신기해요. 서울 한강 주변에서 찍은 것도 많거든요.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는 대상들이죠. 아마 사진이니까 그렇게 오래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밖에 나가서 실제로 한곳에 멈춰 서 있으라고 하면 그것도 쉽지 않겠죠. 결국 관객들이 각자 편한 방식으로 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오래 머물러도 좋고, 사진을 찍어도 좋고요.

Q 작가님에게 사진이란 무엇인가요?

잘하고 싶은 일이요. 생계를 위한 일일 수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일일 수도 있겠죠. 저는 무언가를 쌓아 만들어 가는 걸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사진은 잘하고 싶은 일이에요.

제가 노래를 정말 못하거든요. 그래서 가수들의 콘서트 포스터를 찍거나 그들을 촬영할 때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그 사람들도 사진 찍는 걸 어려워하지만, 많은 관객 앞에서 자기 목소리와 몸을 조절하면서 퍼포먼스를 하잖아요.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대신 하루하루 노력한 결과를 잘 모아서 사진을 더 잘 찍고 싶어요.

처음에는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빨리 쌓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쌓이고 나니 이제는 잘 쌓아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이 기사 공유하기:

조예은

조예은 에디터

기사 더보기

Other ArticleOTHER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