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를 이해한다는 것, <에덴의 동쪽>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각색한 넷플릭스 시리즈 <에덴의 동쪽>은 악녀로 규정돼 온 캐시 에임스를 잔혹한 선택을 거듭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한 인물로 다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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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이해한다는 것, <에덴의 동쪽>
애덤(크리스토퍼 애벗 분)과 캐시(플로렌스 퓨 분)의 모습사진=넷플릭스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52년에 존 스타인벡이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인 『에덴의 동쪽』을 발표했을 때, 주요 인물인 캐시 에임스에 대한 평은 이견이 거의 없었다. 캐시를 그린 방식을 칭찬하든 비판하든, 당시 평론가들은 그를 순수한 악의 화신으로 여겼다. 평론가 대부분이 남성이었던 당시, 한 매체는 캐시를 ‘악랄한 창녀’라고 불렀고, 뉴욕타임스는 문학사상 ‘가장 악랄한 여성’으로 꼽았다.

그럴 만도 했다. 캐시는 한 남자를 자살로 몰아넣고, 십 대 때 부모를 살해한다.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형제와 잠자리를 갖고 쌍둥이를 낳지만, 충격에 빠진 남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아이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후 매춘 업소에 자리를 잡은 그는 업소 주인의 환심을 산다. 외로운 주인이 재산을 물려주자, 이번에는 그를 독살한다. 그 뒤로도 캐시의 삶은 가학과 피학, 협박, 착취, 폭력으로 얼룩진다.

이처럼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인물을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자. 스타인벡의 소설을 읽고 조이 카잔이 연출한 넷플릭스 각색판을 보면서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19세기 여성이라는 굴레를 쓰고 태어난 캐시가 앞서 벌어진 일들에서 조금이라도 덜 잔혹하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성인 남성의 자살을 막을 수는 있었을지 모른다. 대신 그의 어린 신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부모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자신을 때리던 아버지 밑에서 계속 살아야 했을 것이다. 결혼과 외도, 임신, 총격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약혼자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처 입고 빈털터리가 된 채 도망자 신세가 된 여성을 받아 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앞날 역시 비참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캐시가 악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얻으려 했던 사람이라면, 실제로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카잔의 7부작 시리즈는 바로 이런 가정에서 출발한다. 여성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남성 인물과 다른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이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다. 하나의 우화로서 두 세대에 걸친 형제들이 카인과 아벨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에덴의 동쪽>은 비중이 작은 인물에게도 저마다의 성격과 관심사, 장단점을 부여한다. 오늘날 창작자들은 크루엘라 드 빌이나 간호사 래치드 같은 여성 악역에게 트라우마를 간직한 과거를 덧붙이고, 화려한 옷을 입혀 밈으로 소비되는 반항적인 안티히어로로 바꾸곤 한다.

하지만 카잔은 스타인벡의 원작에 단단히 뿌리를 둔 채 캐시를 새롭게 그려냈고, 플로렌스 퓨는 흔들림 없는 연기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카잔은 최근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의 텍스트가 제가 읽은 방식에 힘을 실어준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허세 섞인 자신감이 아니다. 캐시의 끔찍한 행동을 설명하려 새로운 이유를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원작에 이미 충분한 단서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캐시를 제대로 그리는 일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용서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캐시라는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일이었다.

도망쳐 온 캐시를 발견하는 애덤과 찰스. 사진=넷플릭스

시리즈의 첫 장면은 이야기의 흐름과 상징이라는 두 측면에서 중요하다. 스타인벡이 차분하게 묘사한 캘리포니아의 풍경 대신, 이야기 후반부에 벌어질 결정적인 순간을 먼저 보여준다. 어두운 밤하늘 탓에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캐시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심하게 얻어맞은 채 신음하며 배를 바닥에 댄 채 농가를 향해 기어간다. 이 인물의 등장은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주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 것이다.

“나는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괴물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믿는다.” 화면 위로 캐시의 목소리가 흐른다. “괴물이란 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에서 크든 작든 벗어난 존재다…하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괴물에게는 정상적인 세상도 오히려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이 대사의 대부분은 스타인벡이 원작에서 캐시를 처음 소개할 때 쓴 문장을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원작과 달리 카잔은 작가를 닮은 서술자가 아니라 캐시 자신의 입을 빌려 이 말을 들려준다. 원작에서도 의미심장한 대목이지만, 시리즈에서는 한층 분명하게 다가온다. 괴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악의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될 가능성조차 없었던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관객을 캐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첫 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서로 대립하는 형제 애덤(크리스토퍼 애벗)과 찰스 트라스크(마이크 파이스트)가 코네티컷의 농장에서 살아가다 캐시를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은 ‘캐시’다. 캐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두 회차 가운데 첫 번째다. 이 에피소드는 다정하고 순진한 애덤의 간호를 받으며 회복하는 캐시의 현재와 그의 과거를 교차해 보여준다.

어린 캐시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그는 다섯 살이다. 영특한 아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넘겨보는 모습은 고전 삽화 속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많은 소년이 사탕을 주겠다며 숲속으로 따라오라고 유혹한다. 루이스 캐럴의 전기를 아는 독자라면 이 장면을 더욱 어둡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탕을 좇아 소년을 따라가는 것은 캐시 자신의 선택이다. 달콤한 것을 향한 욕망은 이미 그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캐시가 이브가 선악과를 베어 무는 순간과 같은 일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그 선택이 성폭력으로 이어지고, 훗날 시리즈에서 밝혀지듯 세상을 향한 불신을 굳혀놓는다는 사실은 더 비극적이다.

퓨는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이 장면이 캐시 역을 맡기로 결심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원작에서는 캐시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소녀가 남자아이들을 죄악으로 이끈다고 묘사되지만, 시리즈는 이 사건을 조금 다르게 각색했다. 퓨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그 장면이 어린 캐시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담은 가장 아름다운 연애편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대목을 읽고 나니 캐시의 편에 설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 학대를 겪고 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캐시는 점차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힘을 얻지만, 그럴수록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선택을 거듭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가해자로 여겨질 학교 교사와 캐시의 부모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캐시를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며 그의 자유를 억누르려 한다. 누구에게나 악몽 같은 일이지만, 어린 시절 자기 몸을 스스로 통제할 권리마저 빼앗긴 캐시에게는 더욱 끔찍한 경험이다. 거의 죽은 몸으로 트라스크 농장에 기어들어 왔을 때도 캐시는 죽을 고비를 막 넘긴 참이었다. 자신을 정부로 삼은 포주가 그를 죽이려 했고, 캐시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질투에 사로잡힌 남자가 그를 살해하려 한 것이다.

이런 설정은 모두 스타인벡의 원작에 나온다. 하지만 카잔과 퓨는 관객이 캐시의 경험을 더욱 가까이에서 느끼도록 이끈다. 우리는 캐시가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저 혼자 있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까지 헤아리게 된다.

자신의 라틴어 선생인 제임스 그루과 길을 걷고 있는 14세 캐시. 사진=넷플릭스

캐시에게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고 해도, 애덤과 결혼해 캘리포니아의 농장으로 향할 무렵에는 이미 바닥난 듯하다. 시리즈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두지는 않는다. 캐시는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아이들의 친부가 찰스일 가능성도 있었다. 애덤은 결혼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분명히 경고했지만, 캐시는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옭아맬 때마다 그랬듯 다시 도망친다. 이번에도 상대에게 육체적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무너뜨린다.

자신을 양녀이자 공식적인 상속인으로 받아들인 매춘 업소 주인 페이(마사 플림턴)에게도 마찬가지다. 페이는 캐시를 딸처럼 받아들이는 대신, 더는 손님을 받으며 직접 돈을 벌지 말라는 조건을 내건다. 앞서 캐시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과 달리 애덤과 페이는 그에게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캐시의 잔혹함뿐 아니라 자신들이 외면해 온 현실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캐시는 이토록 끔찍한 방식으로나마 자유를 얻으려 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자유는 경제적 자유예요.” 캐시가 말한다.

순수한 악으로 여겨져 온 인물치고 캐시는 놀라울 만큼 공정하다. 적어도 아무 이유 없이 남을 해치려는 악의는 크지 않다. 스타인벡은 캐시가 페이에게서 물려받은 매춘 업소를 운영하는 모습을 통해 이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곳에서 캐시는 케이트라는 이름을 쓴다.

“그가 정한 규칙을 따르고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키기만 하면, 케이트는 그들을 돌보고 보호해 주었다. 거기에는 사랑도 존중도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상을 주지 않았고, 규칙을 어긴 여자를 두 번까지만 벌한 뒤에는 내보냈다. 여자들은 적어도 아무 이유 없이 벌받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과 시리즈에서 캐시의 가학성은 위선적인 남자들을 향한다. 권력을 휘두르고 도덕을 설교하며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경받기를 바라면서도, 매춘 업소에서는 온갖 타락한 행위를 즐기는 이들이다. 캐시의 이런 태도에는 다섯 살 때부터 형성된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 선악과를 베어 문 뒤 선과 악을 깨달은 이브처럼, 캐시 역시 일찍이 세상의 이면을 알아버린 것이다.

카잔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스타인벡이 캐시라는 인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상하게도 스타인벡은 캐시라는 인물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 같아요. 외모를 묘사하는 방식부터 점점 잔인해지죠.” 캐시는 나이가 들수록 매력을 잃고, 관절염으로 손마저 뒤틀린다. 그렇다고 스타인벡이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 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캐시를 훨씬 복잡한 인물로 그렸다. 적어도 그를 그저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도록 여지를 남겼다.

스타인벡은 어느 대목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캐시를 괴물이라고 말했을 때, 내게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덧붙인다.

“이제 나는 돋보기를 들고 그에 관한 작은 글씨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각주를 다시 읽었다. 그러자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는지도 영영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것이었다면, 그가 정말 벗어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에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말하려 했지만, 서로 통하는 언어가 없어 그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언어였을 수도 있다. 형식이 있고 정교하게 발달했지만, 해독할 수 없는 언어 말이다. 그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 말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페이를 쳐다보고 있는 캐시. 사진=넷플릭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독자가 미처 궁금해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스타인벡의 고백은 뜻밖이다. 그는 캐시에게 자신조차 끝내 이해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그 덕분에 카잔과 퓨가 새로운 해석을 보탤 여지도 생긴다. 두 사람이 여성이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냉소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확인받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캐시를 더 깊이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캐시의 내면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것은 분명하다. 카잔의 할아버지인 엘리아 카잔이 연출한 1955년 영화도 그 자체로 걸작이지만, 애덤의 아들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캐시는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카잔이 캐시를 가장 과감하게 재해석하는 대목은 그의 자살을 앞둔 순간이다. 캐시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죽음을 택한다. 약물에 취한 듯 환각에 빠진 그는 찰스와 대화를 나눈다. 어쩌면 찰스는 캐시가 한때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리즈는 캐시를 이기적인 성향을 지닌 또 다른 두 인물, 찰스와 아들 칼(조지프 자다)과 나란히 놓는다.

두 사람은 캐시보다 나은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 차이는 타고난 본성보다 자라온 환경에서 비롯된 듯하다. 찰스에게는 농장에 틀어박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 칼은 총명하고 도덕적으로 올곧은 리(훈 리)의 사랑 속에서 자랐고,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까지 받는다. 반면 캐시에게는 그런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애덤은 죽음을 앞두고 칼에게 좋은 삶을 살아보라고 허락하지만, 캐시에게는 누구도 그런 허락을 해준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캐시가 마지막으로 환각 속에서 만나는 인물이 다섯 살 때의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처럼 차려입은 어린 캐시와 눈물로 얼싸안는 장면이다. 사탕을 건넨 소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더라면, 캐시도 차갑게 굳어버린 본성을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 와서야 그 가능성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에서 퓨는 평생 감추고 억눌러온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놀라운 연기를 펼친다.

스타인벡이 창조한 캐시는 결코 사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브에 가까웠고, 카잔은 두 인물의 닮은 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카잔의 <에덴의 동쪽>은 다른 이미지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타고난 욕망을 좇아 흰토끼를 따라갔다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굴속으로 떨어지는 앨리스, 바로 그 모습으로 캐시를 남긴다.

글 Judy Berman

한국어판 편집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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