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트럼프의 ICC 제재에 ‘차단규정’으로 맞설까
미국의 금융 제재를 우려한 은행들이 벌써 ICC와의 거래를 피하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대응 수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유럽, 트럼프의 ICC 제재에 ‘차단규정’으로 맞설까
미국의 금융 제재를 우려한 은행들이 벌써 ICC와의 거래를 피하는 가운데, 유럽에서는 대응 수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장유정 에디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유럽은 ICC에 대한 지지를 거듭 밝히고 있다. ICC는 전쟁범죄와 집단살해 등 중대한 국제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형사책임을 묻는 상설 국제재판소다.
유럽의회는 지난 22일(현지 시간) ICC와 그 관계자들을 사하로프 사상의 자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국제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재판소의 중요한 활동”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앞서 발표된 노벨평화상 수상자 선정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담겼다. 지난 9일 나비 필라이 전 ICC 재판관을 올해 수상자로 선정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결정이 “규범에 기반한 국제체제를 공격하고 훼손하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필라이의 수상 발표 몇 시간 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ICC에 대한 광범위한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기존 제재가 ICC 소추관과 재판관 개인을 겨냥했다면, 이번에는 재판소 자체를 대상으로 삼았다. 미국과 ICC 간 거래를 차단해 “재판소의 자원을 끊는 것”이 목표다.
WHY WE WROTE THIS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125개국이 가입한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재를 부과하자, 유럽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이번 갈등은 국제사법제도가 강대국의 정치·경제적 압력 속에서도 독립성을 지키고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미국은 왜 ICC를 압박하나
트럼프 행정부는 ICC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부당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행위를 조사한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ICC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ICC의 관할권 행사에도 반대해 왔다. 다만 범죄가 발생한 지역 등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비가입국 국민에게도 ICC의 관할권이 미칠 수 있다. ICC는 로마규정 당사국인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발생한 범죄에도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ICC 회원국들에 “이 불량 기관에서 즉시 공식 탈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우리에게 관할권도 없는 반미 재판소가 미국 군인이나 다른 누구를 조사하거나 보여주기식 재판에 넘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지도자들은 이 요구를 즉각 거부했다.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은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롭 예턴 네덜란드 총리도 유엔총회 연설에서 “가능한 대응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ICC와 국제법 질서를 보호하는 모든 기관에 ‘손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U도 미국의 제재를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20일 연설에서 미국이 ICC 재판관 9명과 수석 소추관 등 개인을 제재한 데 이어, 재판소 자체까지 제재해 기관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 다만 당장 강경 대응에 나서지는 않았다. 칼라스 고위대표는 앞으로 6개월 동안 “대화를 시작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며 외교적 대응에 무게를 뒀다.
유럽의회, 미국 제재 막을 ‘차단규정’ 발동 요구
EU 집행부는 미국과의 소통을 강조하지만, 유럽의회는 더 강력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데이비드 맥앨리스터 외교위원장과 무니르 사투리 인권소위원장 등 주요 의원들은 9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EU 집행위원회에 ‘차단규정’을 발동하라고 촉구했다. 차단규정은 미국 등 다른 나라가 자국 법률에 따라 EU 기업을 제재하려 할 때, 유럽 기업들이 해당 제재를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의원들은 성명에서 “유럽연합은 이제 구체적인 행동으로 ICC에 대한 굳건한 연대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즉시 EU 차단규정을 발동해 미국 제재의 역외 적용으로부터 재판소와 유럽의 관련 주체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유럽은 국제법과 법치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확고한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의회 의원 58명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도 차단규정 발동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EU는 2018년 미국이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이란 제재를 재개했을 때도 차단규정을 개정해 대응한 바 있다.
칼라스 고위대표는 ICC를 보호하기 위해 차단규정을 활용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모든 선택지를 열어둬야 한다. 차단규정을 사용한다면 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고, 제대로 해야 한다. 따라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 기업들에는 미국의 제재를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미국 제재에 ICC 직원들 은행 거래도 차질
6개월의 초기 유예기간을 뒀지만, 제재의 여파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ICC 부소추관 나즈핫 샤밈 칸은 지난주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직원들이 은행 업무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제재의 적용 범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은행들이 위험을 피하려고 실제 요구되는 수준보다 엄격하게 거래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재판소 업무에는 아직 지장이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제재로 인해 ICC 운영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재판 업무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거나 재판관이 미국을 방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재판소의 핵심 업무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EU법과 법철학을 가르치는 나빌 하비르푸르 강사는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법치주의와 공정한 분쟁 해결은 해당 기관이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지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며 “현장에서든 법적 절차 안에서든 증인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들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EU가 실제로 차단규정을 발동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네덜란드 오픈대학교의 세르게이 바실리예프 국제법 교수는 차단규정 발동이 매우 중요한 조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이 “재판소 보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트럼프 행정부에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이미 긴장된 상황에서는 “매우 극단적이거나 급진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를 더욱 자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ICC 내부에서는 제재로 인한 피해를 줄일 다른 방안도 거론된다. ICC 사무처장 오스발도 사발라 힐레르는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기업들에 ‘안심 서한’을 보내는 방안을 제안했다. 미국의 제재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려 기업들의 불안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그러나 바실리예프 교수는 이 방안만으로 문제가 해결될지는 의문이라고 봤다. 그는 “기업들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을 기대하고 있다”며 “그러한 보장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차단규정을 발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ICC 제재 갈등, 미·유럽 관계 악화시키나
트럼프 대통령이 2025년 1월 재집권한 이후,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갈수록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교역국에 여러 차례 관세를 부과했고, EU와 회원국들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올해 1월에는 그린란드를 미국 영토로 확보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당시 미국 공화당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이 나왔다.
지난 9월에는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캐나다에 EU 최초의 ‘준회원’이 되는 방안을 함께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터무니없다”고 비난하며, 실제로 추진된다면 “매우 강력한 관세를 부과하거나 유럽과의 많은 분야에서 무역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국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 문제로 나토 탈퇴 가능성까지 거론했고, 이란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군사적으로 적극 개입하지 않는 나토 회원국들을 비난했다.
무역과 안보 문제로 이미 여러 차례 충돌한 미국과 유럽이 ICC 제재를 놓고도 맞서는 상황이다.
하비르푸르는 양측의 갈등이 계속된다면 “무역전쟁에서 목격한 것과 같은 불안정한 상황이 더욱 빠르게 확산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국제기구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글 Callum Sutherland, TIME 기자
한국어판 편집 장유정 기자 chloe@tim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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