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거물들의 종말론, 그 미래에 당신은 없다

AI를 통해 올트먼은 번영을, 머스크는 생존을, 틸은 기술 발전을 약속한다.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는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종말론’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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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거물들의 종말론, 그 미래에 당신은 없다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게임 1500m 경기에서 관중이 출전 로봇을 향해 환호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누구나 세상의 끝을 그려본다. 이상이 실현된 세상일 수도, 모든 것이 망가진 세상일 수도 있다.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까지가 하나의 그림이다. 종교에서는 이를 ‘종말론’이라 부른다.

종말론은 세상의 멸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종말론(eschat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에스카톤(eschaton)’은 ‘마지막 것들’을 뜻한다. 현대적으로 옮기면 세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믿음의 체계다.

종말론을 갖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진영의 전망이든, 정치적 낙관주의도 일종의 종말론이다. 민주사회주의자인 조란 맘다니는 무상 보육과 대중교통 무상화 같은 정책으로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현행 이민 단속 정책의 설계자 중 한 명인 스티븐 밀러는 국경을 봉쇄하고 이민자를 대거 추방하면 한때 우리 것이었으나 잃어버린 미래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미래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 정리하면, 종말론은 윤리를 만든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 것이라 믿느냐에 따라 오늘 해야 할 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WHY WE WROTE THIS

AI를 둘러싼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린다.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익숙한 논쟁에서 한 발 비켜서서, AI 산업을 이끄는 이들이 그리는 이상적 미래를 짚어봤다.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종말론

실리콘밸리에도 종말론이 있다. 그곳의 거물 중 일부는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꽤 솔직하게 밝혀왔다. AI가 인류를 초월하고, 인간이라는 종은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만든 AI가 승리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전망이다.

이를 사업 전략이 아니라 하나의 종말론으로 읽으면 설명되는 것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우리가 집중력과 비판적 사고력처럼 과거에는 당연했던 능력을 잃어가는 데 왜 그토록 무심한지다. 그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물론 실리콘밸리 최고경영자(CEO)들이 AI의 힘을 바라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먼저 오픈AI의 샘 올트먼이다. 그는 대다수 사람에게 ‘챗봇’이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부터 AI에 대한 전망을 분명히 밝혀왔다.

올트먼은 2015년 한 스타트업 콘퍼런스에서 “나는 AI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세상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동안 뛰어난 머신러닝 기술을 바탕으로 훌륭한 기업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파국적 종말론이 그의 사업 구상의 토대였다. 인류 멸종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전에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후 올트먼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2026년 4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모두를 위한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힘을 부여하며,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내게 도덕적 의무다. AI는 인간의 역량을 키우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 도구에 대한 수요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놀라운 일을 해낼 것이다. 세계에는 막대한 양의 AI가 필요하며, 우리는 이를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혀 다른 종말론이고, 전혀 다른 사업 논리다. 이제 AI에 투자할 이유는 인류 멸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AI가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가 있다. 그의 행동 이면에 깔린 종말론을 들여다보면 평생 벌여온 사업의 맥락이 잡힌다. 오픈AI 공동창업자인 머스크는 인류 멸종이 매우 현실적인 위협이며, 자신이 직접 이를 막으려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2013년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근본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여러 행성에 사는 종이 되거나, 하나의 행성에 갇힌 채 언젠가 닥칠 멸종을 맞는 것이다.”

스페이스X는 두 번째 미래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 볼 수 있다. 소행성이나 거대화산, 팬데믹, 또는 인류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AI에 대비한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스크의 종말론은 인류가 우주를 식민지로 개척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구원은 우주에 나갈 수 있는 사람만의 것이다.

머스크가 공감을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약점”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관점이 암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과는 앞뒤가 맞는다. 어차피 인류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이후에도 ‘AI 종말’에 대한 주장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오픈AI가 애초의 비영리 구조를 변경했다는 이유로 올트먼과 오픈AI, 그레그 브록먼 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도 자신의 종말론을 꺼내 들었다. 머스크는 지난 4월 “최악은 영화 ‘터미네이터’ 같은 상황”이라며 “즉, AI가 우리 모두를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본 곤잘레스 로저스 판사가 말을 끊었다. “이 사건에서 인류의 멸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들 알아들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5월 오클랜드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머스크의 주장을 기각했다. 다만 그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머스크가 왜 오픈AI가 비영리 조직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오픈AI 측 변호인들은 다른 설명을 내놨다. 머스크가 오픈AI의 재정적 성공을 질투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기업가 피터 틸은 종말론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물이다. 그는 21세기의 적그리스도가 “모든 과학을 중단시키려는 러다이트”라고 주장하는 강연을 이어왔다. 사례로는 AI 연구자 엘리에저 유드코프스키와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든다.

틸의 사고방식에서는 신중론과 규제가 곧 종말론적 위협이다. 올해 교황 레오 14세가 첫 회칙에서 AI에 대한 국제적 감독을 촉구했을 때, 틸이 교황을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의 대리인”이라 부른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국을 억제해 중국이 기술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돕고 있다는 주장이다. 교황을 두고 할 법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틸이 그리는 미래를 이해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의 세계관에서 기술에 한계를 두자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미래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존재일 뿐이다.

종말론이 향하는 방향

세 명의 기술업계 거물은 인류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서로 다른 세 가지 그림을 그린다. 체념과 생존주의, 파국주의다. 하지만 나는 이 세 가지가 결국 같은 결말로 수렴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에서 미래란 인류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각의 미래에서 누가 빠져 있는지도 보자. 올트먼의 미래에는 “훌륭한 기업”과 “인간 잠재력의 확대”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I 때문에 일자리를 잃거나 필요 없는 존재가 될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상대적으로 적다.

머스크의 미래에는 우주 식민지로 향하는 우주선에 자리를 예약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은 있을지 모른다. 나머지 사람들의 자리는 많지 않다. 틸의 미래에는 혁신은 있지만, 무엇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혁신하는지 묻는 사람들의 자리는 거의 없다. 어느 경우든 미래에 이해관계가 걸린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미래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

이는 일부 기술업계 거물이 자선 활동이나 이익 공유에 그토록 무관심한 이유도 설명해준다. 인간의 시대가 끝나가고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 진심으로 믿는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낄 이유도 사라진다.

이들이 생각하는 미래에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공중보건이나 주거, 건강한 시민사회에 투자할 이유도 없다. 20년 뒤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을 학교와 지하철에 돈을 쓰고, 자신이 이용하지 않을 공공서비스를 위해 세금을 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종말론은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윤리의 부재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한다. 공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원을 낭비하는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종말론적 사고가 실제 힘을 발휘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행동을 규정함으로써 어떤 미래가 가능할지까지 결정한다.

누가 무엇을 하든 인류의 시간이 곧 끝난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선택은 도덕적 실패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한 판단처럼 보인다. 이런 종말론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잔혹함을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읽어낸 결과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 종말론이 위험한 이유는 이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자원을 가장 많이 가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머스크와 올트먼, 틸은 종말의 시대를 놓고 사변하는 신학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종말론이 예고하는 미래를 직접 만들고 있다. 그 미래를 만들 자신들의 힘을 지켜주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에 돈을 대고, 속도를 늦추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정당한 우려를 제기하는 시민이 아니라 러다이트나 적그리스도로 취급한다.

현재는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도, 현재를 바꿀 힘을 가진 사람들이 품으면 단순한 믿음에 머물지 않는다. 정책이 되고 제품이 되고 선례가 된다. 그리고 누구의 동의도 없이, 실리콘밸리의 소수 엘리트가 모두를 대신해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글 Liz Bucar, 노스웨스턴대 종교학 교수

편집 최문정 에디터

이 기사의 원본보기: Why Silicon Valley’s Vision of the AI Future Should Worry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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