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얼굴의 다른 사랑, <아사코> [아시아의 장면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똑같이 닮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같은 사랑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두 편의 연극과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경유해, 모순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닮은 얼굴의 다른 사랑, <아사코> [아시아의 장면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는 똑같이 닮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같은 사랑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두 편의 연극과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경유해, 모순과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조예은 에디터
![닮은 얼굴의 다른 사랑, <아사코>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373%2Fe70a73f7541c4c6f881705cbdadc4f64.jpg&w=3840&q=75)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고쵸 시게오의 <SELF AND OTHERS> 전시 현장. 작품 속 두 소녀가 손을 맞잡고 있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키에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신발을 신은 모습. 얼굴과 표정 또한 닮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시차는 있지만 이를 유심히 보던 두 사람이 있다. 아사코와 바쿠, 또는 아사코와 료헤이. 바쿠와 료헤이는 똑 닮았지만 둘은 다른 사람이다. 아사코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 모양 역시 엄연히 다르다.
‘아침’이라는 이름의 아사코는 ‘보리’라는 이름의 바쿠에게 거짓말처럼 빠져들었다. 시끄러운 클럽 안에서, 함께 탄 오토바이가 전복된 후 길바닥에서, 빵을 사 오겠다더니 새벽이 지나서야 나타난 연인의 품에서, 그의 시선은 바쿠에게 고정되어 있다. 갑자기 일어난 접촉 사고처럼, 훅 다가와 버린 우연 같은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바쿠의 자리는 대체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느 날, 그가 홀연히 떠나버리고 거짓말처럼 료헤이가 나타났다. 가게의 커피포트를 가지러 간 회사에서, 바쿠와 봤던 전시가 또 한 번 열린 현장에서, 친구의 초대로 그를 들인 집과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고백을 듣던 옥상 계단에서, 아사코는 료헤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에는 바쿠가 돌아온 줄 알았고, 이제는 그가 료헤이라는 것을 안다. 닮은 듯 다른 이 사람을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을까. 확신만이 가득했던 옛사랑과 달리, 의심이 함께 하는 이 사랑에 아사코는 일단 한 발 물러선다.
우연이 다시 운명이 되는 순간

그 망설임에 균열을 낸 건, 실제적인 지각 변동이다. 동일본 대지진의 전진이 발생한 날, 두 사람은 극적으로 재회한다. 료헤이가 아사코를 보러 간 극장도 아사코가 료헤이를 발견한 길거리도 모두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이 혼란을 뚫고 용케 서로를 발견했으니, 다시 한번 우연이 운명으로 되어버린다.
당연하게 주어지던 내일과 문제없이 굴러가는 듯했던 일상에 생긴 커다란 위협은 그 속에 젖어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잊고 지내왔던 인간의 취약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애써 지키려는 양심과 부정하는 이끌림은 모두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그렇게 맺어진 사랑의 의의를 지키려는 듯,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꾸준히 도호쿠(東北) 지방의 재해 지역으로 봉사를 간다. 틈틈이 말과 행동으로 ‘사랑한다’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료헤이는 이에 성실히 응하면서 아사코를 안정시킨다. 여태 말 못 한 사정도 너그러이 이해하면서, 성숙한 관계를 완성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기어코 아사코와 바쿠의 애꿎은 재회를 성사한다. 몇 년이 지났어도, 그동안 그를 지웠어도, 떠나가는 뒷모습에 힘차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어도, 대면하지 못한 옛사랑의 미련은 득달같이 찾아온다. 바쿠의 모습과 목소리를 통해, 터무니없는 방문과 제안을 통해, 꿈만 같던 두 사람의 시간을 깨트리는 것이다.
바쿠를 사랑한 내가 료헤이라는 꿈을 꾼 것일까, 료헤이를 사랑한 내가 바쿠라는 꿈을 꾼 것일까. 바쿠를 사랑한 과거의 내가 나일까, 료헤이를 사랑한 현재의 내가 나일까. 료헤이와 결혼을 약속하고도, 끝내 바쿠의 손을 잡고 한밤중에 도망쳤던 아사코는 아침에 눈을 뜨며 깨닫는다.
바쿠는 이제 허상이라는 걸, 료헤이만이 자신에게 실재라는 걸. 소리만 들리던 거대한 바다를 마침내 마주했을 때의 깨달음처럼, 사랑을 두고 꾼 호접지몽은 아사코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지체할 틈 없이 그는 이 도피를 끝낸다. 그리고 자신이 두고 온 그곳을 향해 정처 없이 걷는다.
연극이 비추는 삶의 얼굴

이처럼 <아사코>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탐구하는 영화다. 막연한 이끌림, 깊은 유대감, 불현듯 닥치는 불안함, 혼자 남았을 때 찾아오는 공허함, 다시 보고 싶다는 간절함, 새로운 대상에게 느끼는 기시감, 이 모든 과정 속 얻게 되는 갈등까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의 내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처럼 어김없이 등장하는 두 편의 연극은 그러한 전개를 암시하며 또 매개한다.
가령, 아사코의 운명은 진실의 무게감을 다룬 작품으로 이미 예견됐다. 세상이 뒤흔들렸던 날, 벽에서 떨어졌던 헨릭 입센의 <들오리> 포스터를 기억하자. 1884년에 쓰인 이 희곡은 ‘정직’의 힘을 믿었던 한 외부인이 오랫동안 묻혀 있던 비밀을 파헤치면서, 평화가 깨진 한 집안이 고통스러운 물음을 소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를 반영하듯 아사코 역시 두 남성을 온전히 겪어 나가며 그 사이를 왕복해 위태롭게 자신의 진심에 다가간다.
사람의 악몽을 먹는 짐승, 맥(貘)을 뜻하기도 하는 바쿠는 사랑을 향한 아사코의 환상과도 같다. 마음대로 다가왔다가 마음대로 떠나가는 그는 해결되지 못한 그리움이자, 강렬한 기억으로서 자극적인 존재다. 반면, 오랫동안 인내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애쓰는 료헤이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실체다. 꾸준한 노력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던 그는 잠깐의 퇴장에도 긴 여운을 남기며, 아사코가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쿠시하시와 마야의 삶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 속 이리나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모스크바에 돌아가기 위한 소망을 품고 일을 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을 경험했던 이리나처럼, 쿠시하시에게도 그러한 자격지심이 있다.
2막에서 일을 시작하는 장면을 시연하는 마야의 연기가 끝난 뒤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것도. 대사를 지나치게 해석하지 말라며 몸소 시범 연기를 선보인 것도. 결국 관객의 관심을 얻으려 한 것 아닌지 그 진정성에 의문을 표한 것도. 모두 한때 연극을 꿈꿨지만, 포기했던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를 끄집어내는 것은 지금까지의 대화를 지켜보던 ‘관객’이다. 아사코는 자기 일에 헌신적인 마야를 지지하고, 료헤이는 쿠시하시에게 나중에 부끄럽지 않을 기회를 주고 싶다며 사과를 권한다. 결국 그 순간을 회피하지 않은 쿠시하시는 질투가 났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마야와의 새로운 관계성을 연다.
마치 연극처럼 인물들이 전후경으로 배치된 가운데, 부엌에서 보는 거실의 풍경은 하나의 프레임 속 무대가 되기도, 이를 깨는 개입으로 토론 현장이 되기도 한다. 삶을 모방한 연극이 다시 삶 속으로 녹아드는 순간이다.
한편, 이리나가 투젠바흐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결혼을 선택하려 했던 것처럼, 마야 역시 료헤이에게 미련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품은 채 쿠시하시와 결혼한다.
처음 아사코와 사는 집에 그를 초대하고, 자기 연극을 보러 온 그를 반갑게 맞이했던 것도. 아사코가 떠난 뒤 피폐해진 그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떠나가는 택시를 쫓아가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은 것도. 모두 료헤이를 향해 정리되지 못한 감정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마야의 삶은 계속된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찍’ 태어난 딸은 미처 매듭짓지 못한 그의 마음을 안고서도 꾸려 나가야 하는 가정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끝까지 나아간 끝에 료헤이와의 관계를 깨뜨렸던 아사코의 선택과 대비된다.
이처럼 ‘삶’을 표현하는 연극은 <아사코> 속 각 인물의 삶을 비추고, 그들이 마주한 순간의 선택을 조명한다.
모순을 끌어안는 멜로드라마

영화학자 벤 싱어는 멜로드라마를 구성하는 요소로 5가지를 제시한다. 관객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의 고통, 격렬하게 치닫는 감정, 선과 악의 대립, 익숙한 이야기 전개에서 벗어나는 구성, 극적인 사건과 볼거리까지. 이는 필수 조건이 아니기에, 작품마다 서로 다른 조합으로 저마다의 멜로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아사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아사코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버림받은 료헤이의 모습으로 짙은 파토스를 자아낸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는 삼각관계 안에 끓어오르는 감정은 인물의 극단적인 행동과 고조되는 음악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아사코를 향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다. 료헤이에게 돌아가려는 아사코를 두고 도호쿠 할아버지는 ‘다시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평하지만, 오카자키의 어머니는 그저 ‘좋은 때’라며 이 또한 지나갈 성장 과정임을 암시한다. 즉,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그 틀 안에 머물지 않는 작품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 <아사코>를 봐야 할 이유를 만들어 준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멜로드라마의 “중간적인 성격”을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다양한 관점이 들어설 여지”를 열어주며, 누군가는 비극의 슬픔을 느끼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살아가면서도 어리석은 일”을 하는 모순. 감독은 그 모순이야말로 우리 삶의 모습이며, 그렇기에 삶 자체가 멜로드라마적이라고 말한다.

불꽃이 튀며 순식간에 빠져들었던 사랑이라는 이상은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모두 씻겨 내려간다. 한껏 불어난 강만큼이나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순간이다. 그 모습을 보고 료헤이는 ‘더럽다’고 말하지만, 아사코는 ‘아름답다’고 답한다. 두 사람의 격차는 순수한 최선과 불가피한 혼란이라는 경험의 차이로부터 온다.
언젠가 료헤이가 아사코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서하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절대로 열어주지 않겠다던 문의 잠금장치를 마지못해 풀어둔 그의 수용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의미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삶의 일부분임을 보여주니까.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이 기사 공유하기:




![서로 맞대어 꾸는 꿈, <룩백> [아시아의 장면들]](/_next/image?url=https%3A%2F%2Ftime-korea-images-prod.s3.ap-northeast-2.amazonaws.com%2Farticles%2F339%2Fcec27c84d53b4171a67eff0693b333e0.jpg&w=3840&q=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