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남을 잠시 머문 마음, <낮과 밤은 서로에게> [아시아의 장면들]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한 카페를 오가는 네 쌍의 인물을 통해 만남과 이별, 기억과 관계의 의미를 살핀다. 서로 다른 시간과 감정을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며, 인물의 표정과 침묵을 세심하게 따라가는 김종관 감독 특유의 연출로 사랑의 보편적인 감정을 그려낸다.

작성 :
오랫동안 남을 잠시 머문 마음, <낮과 밤은 서로에게> [아시아의 장면들]
움직이지 않는 손목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유진.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아시아의 장면들

아시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아시아 영화가 다루는 불안과 욕망은, 지금 우리가 매일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TIME 한국판의 조예은 문화·예술 에디터가 아시아의 감수성,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함께 짚어본다. 한 편의 영화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야기한다. [편집자 주]

어느 한적한 카페. 북적거리지는 않지만, 늘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곳곳에 있는 커다란 그림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곳. 두런두런한 말소리에 절로 귀 기울이게 되는 곳. 어쩌면 가장 내밀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그 공간의 여름부터 가을까지, 네 쌍의 만남과 이별을 주시한다.

김종관 감독의 이전 작품이었던 <더 테이블>, <아무도 없는 곳>,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가 떠오른다. 이번에도 소재는 비슷하다. 시작과 끝, 불안과 욕망, 낯섦과 이해, 이를 아우르는 ‘사랑’을 다룬다. 물론 이전과 달라진 부분도 있다. 농인과 청인, 헤테로와 퀴어 등 ‘정상’으로 불리는 범주 이상까지 나아가니까.

여전히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인 그의 영화는 꼭 단편집 같다. 부담 없이 스르륵 보게 되다가도 어떤 장면만은 오랫동안 남는다. 반복되는 문체에도 한 번씩 거리감이 든다. 농담과 진담 사이의 균형. 완전한 몰입 대신 어느 정도의 서먹함을 낳는 선택들. 그 고수와 변형이 주는 맛에, 가끔 이렇게 기웃거리게 된다.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

카페에서 시계를 고치고 있는 현오.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첫 번째 이야기인 <한여름 밤의 꿈>에는 유진과 현오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꾸었다. 양손 가득 자기 신발 한 짝씩을 들고 도망가는 할머니가 나온 그날. 유진은 맨 발로 온기가 남은 아스팔트 위를 걸어봤고, 들뜬 눈으로 창문을 내다보던 현오는 그 모습을 목격했다. 둘 다 이루고 싶은 ‘꿈’도 있다. 유진은 스위스로 요리 유학을 떠난다. 현오는 스위스에서 시계 공부를 하고 싶다.

주식이라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당장의 물질적 가치에 행복을 느끼는 현오의 친구와 달리, 두 사람은 왠지 비효율적인 것에 마음이 가는 이들이다. 시계 속 정밀한 톱니바퀴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멈춰있는 손목시계의 혹시 모를 초침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것들의 촘촘한 구성이 신기해서. 그냥 보기에 예뻐서.

낮과 밤이라는 다른 시간에 존재했고, 지금은 엇갈렸지만, 유진과 현오는 어쩐지 인연 같다. 아까 빠트린 작은 부품 때문에 현오가 다시 카페에 들렀을 때, 그의 ‘좋은 향’을 맡은 유진만 봐도 그렇다. 함께 있던 1분으로 당신과의 순간을 붙잡았던 <아비정전>의 아비처럼, 잠시나마 서로가 스친 순간은 어떻게 되돌아올지 모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에 그칠 수도 있다. 그래도 어떤 순간은 유독 기억에 남곤 한다. 낯선 시계공인 현오를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시계를 고치지 않겠다 괜히 다짐해 보는 유진처럼. 그런 간지러운 순간만큼은 ‘서로 다른 우주’가 겹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

영민에게 당부하고 있는 상미.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두 번째 이야기인 <아직 나인 사람들>에는 상미와 영민이 나온다.

지극히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 같던 어느 날, 갑자기 상미가 영민 앞에 나타난다. 조금은 상기되고 흥분된 표정으로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그는 중학교 과외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사실 영민에겐 당황할 정도로 낯선 상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미는 얼굴을 붉힐 만한 발언도 서슴없이 꺼낸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이상한 건, 상미의 감정 기복이다. 웃었다가, 심각했다가. 울었다가, 안심했다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감시당하는 것 같은 그는 자꾸 한순간도 잊지 말라며, 다 기억하라고 영민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그 모습을 망상 장애인가 하고 의심할 무렵, 상미가 요청하는 건 결국 하나다. 내가 나임을 지키기.

우리 빼고는 모두 점령당했다며, 카페로 들어온 양복 차림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도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을 과거가 현재 속에 지속되는 방식으로 설명했으니까. 그렇지만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 내가 나일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순간이 분명 존재하니까.

나를 수없이 재정의해야 하는 ‘이 답 없는 지구에서’, ‘너와 내가 만나’ 기억해야 할 것을 얘기할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고 ‘정말 신기한 일’일 수밖에. 잊지 못할 깨달음과 키스를 선사한 상미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진다.

붙잡은 것을 나눈다는 것

어색했던 처음과 달리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남과 혜진.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세 번째 이야기인 <이.순.불>의 주인공은 혜진과 동남이다.

혜진은 오늘도 카페 주인과 직원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한 온라인 채널의 간판 웹소설 작가로 보이는 그는 실제 인물들을 모티프로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이야기를 쓰곤 한다. 그래서 그런가, 몰입력이 남다른 그의 작품은 드라마 판권으로도 이미 물망에 올랐다. 『이토록 순수한 불륜』, 일명 ‘이.순.불’이 바로 그 대상이다.

그러나 혜진은 의심이 많다. 이 작품을 제대로 영상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책 읽기로 지식을 쌓는다는 고귀한 소리에 절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날카로운 사람인데, 그런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또 어떻고.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됐을 거절에 기획 PD가 아예 강수를 뒀다. 방금 뒷담한 독립 영화 감독 동남을 코앞에 앉힌 것.

그런데 이 사람, 혜진만큼이나 범상치 않다. 얼핏 들으면 권모술수 같은 감상평을 속속들이 털어놓는다. 자꾸 작가의 ‘숨겨진 진짜 구멍’을 언급하며, 보이지 않는 욕망을 가시화해 독자의 마음을 훔친 필력을 칭찬한다. ‘그렇게 순수한 불륜을 할 수만 있다면 결혼부터 해야 되겠구나’처럼 고백 같은 호언장담도 던지면서.

젠 체 없고, 가리지 않고, 속을 훤히 드러내는 듯한 소감은 금세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혜진은 동남과 2차를 갈 수밖에 없었다. 나만의 은밀한 방식에서 벗어나, 공유와 소통이라는 새로운 도파민을 방금 막 찾은 것 같았기 때문에.

나눈 것을 두고 간다는 것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나경과 종수의 모습.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마지막 이야기인 <가을 이야기>는 나경과 종수의 것이다.

아마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사귀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둘에게도 ‘끝’이라는 게 와버렸다. 아이돌을 준비하는 나경은 종수와 헤어지길 ‘결심’한다. 그 결정에는 미처 해명하지 않는 수많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계속해서 상대의 표정을 살피면서, 그가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건네는 말들이 그 무게를 전달한다.

종수는 나경의 ‘결심’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이별의 완전한 이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인데도.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이지만, 담담히 그를 배웅하려 한다. 음악을 만드는 대신 요리를 만드는 것으로 진로를 튼 자신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이 생기지 않게. 진심으로 당신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을 조용히 전하는 가운데, ‘우리 엄마 아빠보다 더, 어쩌면 나보다도 더’ 너를 좋아한 것 같다는 말에는 아직 남은 애정과 감정이 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언젠가 다시 보기 전까지는 영영 헤어짐을 감당하겠다는 듯, 종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지못해 몸을 돌리는 나경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야 괜찮아질 수 있을까. 함께 앉아 있던 이 공간에 그동안 나눠 온 시간들을 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는 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고도 결국 익숙해져야 하는 일인지. 유독 길게 느껴졌던 침묵과 한 겹 더 가깝게 느껴지던 고뇌가 이 영화의 마지막과 함께 또 다른 슬프고도 아름다운 서막을 알린다.

영화 속 마지막 시퀀스에서 본인들의 작품을 찍고 있는 혜진과 동남.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카페가 그 대상이다. 사진=㈜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아련한 시작이 끝을 맞이할 때까지. 상대를 향한 의심이 호감과 확신이 설 때까지. 시간과 계절의 순환이 반복될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붙잡으며 나누고 두고 가는가.

그 찰나와 말미를 포착하려는 듯, 카메라가 신중하다. 매번 클로즈업이나 롱숏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인물의 표정이 말보다 많은 걸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초점을 둘 때, 김종관의 영화가 살아난다. 어쩌면 낯간지러울 수 있는 대사들도 자연스레 녹아든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꿈을 말하는 유진과 현오, 어수선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상미와 영민, 회의감과 솔직함을 넘나드는 혜진과 동남, 슬픔과 미련을 나누는 나경과 종수. 그리고 사이사이 등장하는 카페 주인과 직원, 누군가의 친구와 비즈니스 파트너, 애인까지. 화면을 채운 이들의 존재감은 늘 상당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조명을 꺼트려 이를 찍고 연기하며 보는 사람까지도 구별되지 않게 그 경계를 흐린 걸 보면, 결국 이번 옴니버스 작품도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자명하고 말이다.

조예은 기자 sophie@timekorea.co.kr

이 기사 공유하기:

조예은

조예은 에디터

기사 더보기

Other ArticleOTHER ARTICLE